게구리 논란과 게임계의 성 차별

여성 게이머는 원래 게임 안에서 잘 해도 욕을 먹고 못 해도 욕을 먹는다. 아니 플레이를 잘 한다 잘 못한다를 논하기 이전에 여성 게이머는 ‘보호의 대상’이거나 ‘뒤에서 힐이나 해’야하는 존재이고, 또 게임 플레이와 관계 없이 ‘누가 봤다는데 존나 예쁘더라’로 소비되는 대상일 뿐이다. 원래 그렇다.

대체로 여성 게이머들은 그래서 게임 안에서 성별을 밝히는게 좋은 일로 연결되는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에, 성별을 밝히지 않는다. 통계적으로 전체 MMORPG 플레이어의 3~40% 가량은 여성이다. 하지만 게임 안에서 ‘명백히 여성인 플레이어’를 30%나 보고 있나? 아닐걸. 여성이라는 걸 밝혀봐야 인기가 있으면 여왕벌이 되고, 인기가 없으면 남자 꼬시려고 게임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이게 성 역할론, 성적 대상화로 연결된다.

게임 안에서 주도적인 역할(전사라든지 미드라이너라든지)은 당연히 남성이 하는 것이고, 여성은 뒤에서 힐이나 마법을 쓰면서 1234 누르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처음 롤을 시작하는 여성이 있다고 하면 의례껏 서폿을 시키는 것이고, 처음 MMORPG를 시작하는 여성은 의례껏 사제를 하게 한다. 이런 게이머들의 편견이 게구리 논란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여자가 이렇게 잘 할리가 없다’, ‘여자인데도 잘 한다’.

대체로 ‘~에도 (불구하고)’는 척박한 조건이라든지 환경에 대해서 붙이지만, ‘여자임에도 불구하고’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여자인 것이 척박한 조건이나 환경이라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여자는 원래 게임을 못 하는 존재이지만, 넌 잘한다’는 말이다. 칭찬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이구나’라는 말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상대보다 못 하는 것을 납득하는 말이다. 롤의 ‘Faker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선수라서 내가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에게 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특별한 재능을 가진 선수이므로 내가 너보다 못 하는 것을 납득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건 현실의 성차별에서도 같다. ‘여자는 약하다’ 하지만 훈련 받은 군인이나 선수들은 나보다 강하지만, 그들은 특별한 존재라서 인정한다. 그리고 ‘어차피 걔들도 남자 군인한테는 진다’ 같은 표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군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여성 군인’이고 ‘남성 군인 보다는 약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성차별적인 사고는 어떻게 보면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문화적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여자 애한테 무슨 공부를 가르쳐’라는 부모들이 6~70년대 결혼한 내 부모들이었고, ‘여자는 결혼이나 잘 하면 되지’라는게 지금의 부모들이다. 달라진게 없다. 지금의 청년들은 이걸 그대로 물려받아 ‘여자들은 취집이 있잖냐’는 말을 흔하게 내뱉는 상황이다. 어쩌면 더 나빠졌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체화되어 있는 성차별적 사고를 어떻게 인지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사회는 다르게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이게 무슨 성 차별이냐’고 반발하는 이들이 많을수록 이런 충돌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사실 이 세계는 ‘남성이 만든 것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만들어 왔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남성의 성취만 기억할 뿐, 여성의 성취에 대해서 기억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기억이 역사를 만들고, 역사에서 여성의 이름은 사라진다.

여성은 흑인보다도 투표권을 늦게 가질 정도로 노예에 가까웠다. 그리고 보이지 않게 지금도 편견들에 의해 사회의 진출을 제약당하고, 성취를 약탈당하고, 무시당하며 멸시당하고 있다. 그러지 말자. 여자가 게임을 잘 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여성이 게임 안에서 편하게 게임할 수 있게 만드는 것도 또한 페미니즘이다. 그리고 그건, ‘게임 세상’을 점령하고 있는 남성들이 해야할 일이다.

마치 거실에 혼자 앉아 게임을 하다가, 여자친구에게 앉으라며 옆으로 살짝 비켜 앉는 것처럼.

게구리 논란과 게임계의 성 차별

운동 집단에서 여성의 위치

이 내용은 넷플릭스의 <She’s Beautiful when she’s angry>라는 다큐멘터리 중 발췌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60년대 형성하기 시작한 당시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당시 활동가들이 직접 구술로 회상하고 있다. (관련 기사, 영문)

Fran Beal: 그 당시에 있었던 모든 사회적 변화 운동은 결국 여성 운동으로 귀결됐어요. 그들은 여성의 의식화를 높이고자 했죠. 동등한 환경에서 활동하기 위한 필요성이요.

Ruth Rosen: 시민권 운동의 일원으로 반전 운동의 큰 부분을 맡았어요. 버클리 대학원 시절이었죠. 뉴레프트 조직 여성은 직접 느끼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Susan Griffin: 상대적으로 여성은 상당한 차별을 받고 있었죠. 남자들은 이름이 알려졌고 연사가 되기도 했죠. 우린 편지 봉투 풀칠 같은 걸 했죠. 고된 일은 우리가 했어요. 우리가 실제 일(ground works)은 다 했죠. 종종 실제 조직화하는 일도 했어요.

Heather Booth: 전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 연합(SDS) 집회에서 토론했어요. 그리고 저는 그 조직의 리더였죠. 조직의 한 남자가 ‘닥치고 찌그러져’ 이러는 거예요.

Marilyn Webb: 우린 SDS 내에서 여자로서의 고유 역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죠. 왜 우린 지도자 위치에 있지 않은 거야? 그때부터 모든 사람에게 인식의 스파크가 일어났어요. (아하)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다른 사람도 불안하구나.

닉슨의 선거를 저지하는 반전 데모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여성 자체적으로 집단을 만들기로 했죠. 그리고 자체 운동을 선언했어요.

Ellen Willis: 마릴린 웹이 무대에 올라 수많은 뉴레프트(주: 신좌파) 남자들 군중 앞에서 연설을 시작하려고 했어요.

Marilyn Webb: 제가 연설을 시작하자마자 군중들이 미쳐 날뛰었죠.

Ellen Willis: 남자들은 휘파람과 야유를 퍼부었어요. 그리고 ‘무대에서 끌어내려 떡이나 쳐라(Take her off the stage and fuck her)!'(같은 소리를 질렀죠.(자막 누락))

Marilyn Webb: 군중들이 소리쳤죠 ‘구석에 데려가 떡 쳐라(Fuck her down at dark alley)!’ 그건 마치 미친 군중들이었어요.

Ellen Willis: 우린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어이가 없었죠… 뭐야?

Marilyn Webb: 운동하는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할 거라 생각도 못 했어요. 충격받았죠. 흑인 조직도 있고, 저소득층 부녀 조직도 있고, 우린 여성을 조직했는데 다들 이걸 전체 운동의 또 다른 줄기로 봤죠. 하지만 우리는 대접받지 못했어요. (09:20~11:50)

저기서 나오는 60년대 당시 미국 ‘신좌파’들의 행동과 이후 모습은 80~90년대 한국 운동권 진영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다큐멘터리 뒷 부분에는 신좌파들이 페미니즘 운동에 어찌할바를 모르는 모습들도 비춰진다.) 그리고 저 모습들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변한게 전혀 없다고 보인다는게 슬픈 지점이다.

심지어 이제 한국에서 좌파 운동이라는 개념이 사실상 망해버린 상황에서, 자칭 진보라고 싸돌아다니는 혹은 진보 정당의 지지자라는 사람들의 모습에도 저와 같은 것이 똑같이 드러나고 있다. 20년 만에 운동권의 모습이 일반에 다시 나타난 것인가! 하면 그게 아니라, 그 때 그 인간들이 386에서 지금 586세대가 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개선된 것이 없이 그대로 내리 계승되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를 고치려 하지 않았고 페미니스트 활동에 귀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시 좌파 & 진보 진영 안에서 여성 활동가들과 동지들에게 일어났던 사건들, 그 후속 처리들 등을 보면 특히 변한 것은 없다.)

2016년 5월 현재 페이스북과 클리앙을 위시한 온갖 자칭 진보들이 ‘일베나 메갈이나’하며 페미니즘 활동에 ‘무대에서 끌어내려 떡이나 쳐라(Take her off the stage and fuck her)!’ 같은 소리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도 공부 안 하고 말만 많던 386들이 지금 상당 수 현실 정치인이 되어 있고, 지금도 여전히 공부 안 하고 말만 많은 인간들이 진보랍시고 같은 상황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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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all Street Ogle-In Of 1970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지금 페미니스트 진영 일부에서 ‘미러링’이라고 부르는 것 비슷하게) 그 당시 ‘추파의 날(Ogle day in Wallstreet)’이라는 걸 만들어서 남성들이 여성에게 성적 대상화하는 발언들을 던지는 걸 그대로 되돌려주는(same kind of double-edged sexualized compliments) 활동을 기획했다고 한다.

  • ‘미러링’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여전히 정의에 논란이 있지만, 그 개념이 저 때부터 있었다고.
운동 집단에서 여성의 위치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꽤 좋은 전술이다. 내가 받은 기분을 너도 똑같이 느껴봐라는 것이고, 실제로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이 충격은 생각보다 컸으니까. 하지만 여기엔 두 가지 큰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이런 전술로 ‘그들’의 반성을 끌어 내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 또 하나는 ‘미러링’이 된 원본을 함께 보여주지 않으면 ‘미러링’이 원본으로 인식된다는 면에서 자해가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터넷 밈 혹은 정보의 전달률은 10% 수준도 안 되기 때문이다.

맥심(Maxim Korea) 화보 사건

맥심 코리아 2015년 9월호의 표지에 ‘여성을 트렁크에 가둔 장면’을 실은 문제로 크게 논란이 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표지만 보고 그 문제에 대해서 ‘남성인지도 모르지 않느냐’거나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분위기가 있어서, 관련 사진들을 발췌해서 모아 올린다.

이 내용은 보기에 불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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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게제한 사진인데, 명백한 여성이다. 더 확실한 컷이 있었는데 아직 못 찾고 있다. 기사 본문에는 저 트렁크의 모델이 맥심의 여성 에디터라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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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서 게제한 사진인데, 모델(배우 김병옥)이 트렁크의 여성 사체(로 추정되는 내용물)를 검은 봉투에 담아 끌고 있다.

종합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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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여성 혐오로 보는 것도 사실은 옳은 방향인가 싶기도 하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좋아 죽겠지’라는 표제로 ‘너도 이렇게 죽을 수 있어’라고 의도하는 내용이 아닌가 생각한다.

맥심(Maxim Korea) 화보 사건

인권은 의무를 동반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말에, 종종 어떤 사람들은 슬쩍 ‘의무’를 끼워 넣는다. 이를테면 ‘여성은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으면서 권리만 주장한다’라는 식으로.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권리’는 ‘인권’에 대한 이야기다. 시민으로써나 국민으로써나 혹은 누군가의 엄마로써나 아내로써의 권리가 아니라, 인간으로써의 권리다. 이 인간의 권리는 심지어 범죄자든 여성이든 아동이든 노인이든 흑인이든 동남아계 이주민이든 장애인이든, 모두 인간으로 태어난 자 모두가 동등하게 갖는 권리이다. (물론 그 ‘인권’의 발생이 태아의 단계 언제부터냐 하는 식의 논쟁은 아직도 있나보다만.)

그래서, 인권이란,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인간과 범죄자가 동등한 인권을 갖고, 한국에서 태어나 국적을 가진 인간과 해외에서 태어나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진 인간이 동등한 인권을 갖고, 장애가 없는 인간과 장애가 있는 인간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돈이 많은 인간과 돈이 없는 인간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아주 간단한 개념이다.

인간은 모두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여기에서 파생되어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백인과 흑인이 동등한 투표권을 갖게 됐고, 누구나 취업할 때 생김새나 성별로 인해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갖게 됐으며, 미디어에 자신의 의사에 반하게 얼굴을 노출되지 않을 권리를 갖게 됐고, 인간으로써 최소한의 존엄을 갖고 죽을 권리를 갖게 됐으며, 법치국가라는 개념을 세운 국가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등하게 부당한 재판에 항소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됐고… 등등 그런 거다.

그래서 (요즘 특히 논란이 되는) 이자스민 의원의 아동 보호에 관한 법안이 현대 국가라면 어디에서나 보호해야할 아동의 ‘인권’에 대한 내용이기에 반대하는 것이 어처구니 없는 짓이 되는 것이고, 인권을 이야기하는데 국방의 의무를 꺼내어 들이미는 짓이 멍청한 짓이 되는 것이고, 범죄자의 얼굴을 왜 공개 안 하냐는 소리가 미개한 소리가 되는 것이고, 범죄자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이 전세계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국방의 의무’에 대해서도 덧붙이자면: 국민들도 국가로부터 ‘국민으로써의 권리’를 당연히 (국적을 획득하면서 동시에) 갖는다. 여기엔 앞에 이야기한 것보다는 좀 더 좁고 다양한 권리들이 추가된다. (각 국가 시스템에 맞는) 재판을 받을 권리라든지, 자신의 재산을 보호받을 권리라든지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또한 이 권리들은, 세금을 체납했거나 국방의 의무를 안 했다거나 하는 등 국가에 의무를 하지 않았다고 사라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써의 권리, 국민으로써의 권리는, 의무를 동반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구성원으로써의 의무를 수행해야만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같은 헛소리들이 참 많다.

태어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도 인권은 갖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인간이든.

  • 이게 다 도덕시간에 ‘권리와 의무’를 엮어서 교육해서 마치 대칭처럼 보이게 한 교육의 문제다.
인권은 의무를 동반하지 않는다

집밥 논란

‘집밥’이라는 단어가 화제다. 백종원을 둘러싼 황교익의 ‘일침’이 있은 후로 그의 요리를 어떻게 봐야하는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그 중 내가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박권일 선생이 지적한 부분이다.

더 중요한 점은 백종원 신드롬을 불러온 사회환경이다. 왜 사람들은 백종원의 ‘집밥’, 그러니까 원래 재료가 아닌 대체재료, 속성 조리법으로 만든 음식에 저리 열광하는가? 좋은 재료를 확립된 레시피대로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면 어떤 음식이든 맛있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것이다. 그런 음식은 어마어마한 비용을 요구한다는 것, 따라서 그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라는 것.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겐 그런 음식을 만들 여유가 없다. 노동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긴 사회, 야근과 휴일근무가 일상인 나라에서 ‘집밥을 제대로 해먹는다는 것’은 또 다른 스트레스요 부담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크푸드를 배달시켜 먹기엔 눈이 너무 높아져 있다. 돈도 시간도 없는데, 그렇다고 싸구려처럼 보이는 음식은 먹기 싫은 대중의 심리를 백종원은 정확하게 꿰뚫는다. “자, 보세요. 있어 보이쥬?”

‘집밥’은 기본적으로 누군가가 집에서 음식을 차리는 비용 투자를 해야하는 것이다. 밥 차리는데에는 메뉴 구상, 재료 구입, 조리 시간, 식사 시간이라는 단계가 있고 각 단계마다 상당한 수공과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조리의 과정에서는 익히고 끓이고 볶고 하는 경우에는 각 10~20분, 까딱 조림 같은 것이라도 할려면 한 나절이다. 김치를 담그는 건, 특히 김장 김치를 담그는 건 배추를 사다가 절이고 속을 채 썰고, 풀죽을 쑤고 등등 이틀에 걸친 대작업이다.

부모님들의 세대, 그러니까 대략 80~90년대까지만 해도 집에서 가사 노동을 전담하는 사람이 있었다, ‘엄마’라고 부르는. 그 분들이 하루 종일 집에서 쓸고 닦고 가사노동을 하다가, 저녁이 되면 요리를 해놓고 퇴근하는 남편과 자녀들에게 따뜻한 밥을 해 먹이는게 일종의 미덕처럼 받아들여졌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 그 이전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게 당연했을 것이다. 그래서 ‘집밥’이라는 환상이 만들어진 거다.

노동 환격이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한, IMF 이후로 가사 노동에 시간을 쓸 여력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저 IMF라는 것도 이미 20년 전이다. 그 이후로 우리는 경제라는게 좋았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소위 소상공업 개인사업자들이 입에 달고 사는 “~때문에 경제가 나빠졌다”는 이야기는 허상이다. 호황이었던 적이 없었고, 노동 환경은 지속 나빠졌다.

맞벌이 가구가 전체 가구의 절반이다. 국가적인 저소득 상태에, 최장 노동 시간에, 젊은이들은 결혼을 포기할 정도로 취업이 안 되고 있고, 애초에 집에서 뭘 해먹을 여유를 못 갖는 상태다. 혼자 사는 사람은 그냥 밖에서 사 먹고 들어오는게 훨씬 비용과 시간 측면에서 저렴하다.

그래서 여기엔 크게 두 가지의 층위가 존재한다.

  1.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여성의 존재와 그에 대한 인식
  2. 소득 감소와 노동 환경의 변화

집밥의 논란에서 이 두가지가 매우 뒤섞여 있는 느낌이다. 페미니스트들은 1을 강조하고 노동 운동가들은 2를 강조한다. 반면 이 두 맥락을 전혀 못 짚은 구시대 꼰대들은 1과 2의 사이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집밥이라는 존재는 결국 속 편한 시절의 회상에 기반한 환상일 수 밖에 없다. 아침도 못 먹고 출근하는 맞벌이 가족에게 집밥이라는게 가당키나 한가.

집밥 논란

무지와 지적 태만의 결과

김태훈이라는 소위 ‘팝 컬럼니스트’라는 사람이 한 매체에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글을 썼다. 트위터에서 난리가 났고, 이 원문이 너무 처참한 인식의 수준이라 전시하고 분석해보고 싶어졌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어요!” 애국소년 이승복의 한 마디를 닮은 이 말은 ‘어느 날’ 터키에서 실종된 대한민국 한 고등학생의 일갈이다.

일단, ‘애국소년 이승복’ 신화를 여기서 1) 김 군에게 대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2) 이승복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는 그의 형 이승권씨의 증언에만 의지할 뿐, 사실이라고 검증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으며 작문이라는 의혹이 여전히 있다. 3) 김 군은 고등학생이 아니라 중학교를 중퇴했고 은둔형 외톨이로 지냈다.

페미니스트들이 도대체 김 군에게 뭘 어쨌기에 ‘차라리’ 그 무시무시한 IS를 제 발로 찾아가는 길을 선택했을까? AK-47로 백화점에 총격을 가하고, 인질을 참수하는 끔직한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리비아 호텔에 자폭 테러를 행하는 IS보다 ‘어째서’ 페미니스트가 더 싫다고 말했던 것일까?

1) 김 군은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드물었을테니, 소위 ‘페미니스트’를 직접 본 일이나 그런 -주의자의 행동으로 피해를 본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인터넷의 여러 글들을 보고 ‘페미니스트’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형상화했을 것이며, 그 증오를 그대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리고 2) 그는 “페미니스트가 더 싫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건 김태훈의 윤색이다. 김 군은 “지금의 시대는 남자가 차별을 받는 시대다(However, the current era is the era that male are being discriminated against)”, “페미니스트가 싫다. 그래서 IS가 좋다(i hate feminist So I like the isis)”라고 트위터에 적었다.

21세기는 온전히 페미니즘의 시대다. 남녀평등은 이제 구호를 떠나 상식이 됐다. 여성 대통령도 낯설지 않다. 이혼은 재산의 절반을 보장하고,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게 만든 남성은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이쯤 되면 페미니즘은 이제 편의점의 물티슈처럼 도처에 존재하는 무엇이 되었다.

1) “남녀평등이 구호를 떠나 상식이 됐다”의 근거로 여성 대통령과 합의 이혼의 재산 분배,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게 만든 남성의 처벌을 들고 있고, 2) “페미니즘은 이제 편의점의 물티슈처럼 도처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1) 페미니즘은 여성의 인권을 ‘신장’하겠다는 운동이 아니다. 여성의 인권을 끌어 올려서 남성과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권리를 동등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공격하는 것은 ‘성 역할’ 자체다. 즉 ‘여성은 이래야 하고 남성은 이래야 한다’는 개념 자체에 대한 투쟁이다.

여성은 직장에서 커피나 날라와야 하고, 결혼을 하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고, 집에서는 육아를 해야하고, 남편이 배고프다고 전화를 하면 밥을 하러 퇴근을 해야하고, 미니스커트나 파인 옷을 입고 다니면 안 되고, 바지를 입어서도 안 되고, 아이를 낳아야 하는 몸이니까 간수를 잘 해야하고, 길에서 담배를 피워서도 안 되고… 하는 관념이나,

남성은 집안의 가장이니까 돈을 벌어와야 하고, 데이트에서는 남성이 의례껏 돈을 써야하고, 결혼에서 남성은 집을 장만해야 하고, 남성의 말이니까 여성은 따라야 하고, 같은 일을 하더라도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것은 당연하고, 여성보다 남성이 채용되는게 당연하고, 남성이 집안 일을 하면 꼬추가 떨어지고… 같은 관념들에 대한 투쟁이다.

앞의 ‘여성은…’에 대한 고정 관념들을 타파하는 것과 뒤의 ‘남성은…’에 대한 공격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앞의 것을 철폐하는 것이 페미니즘이 아니라, 뒤의 것도 같이 없애는 것이 페미니즘의 목표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 오해는 결국 ‘남성 역차별’이라는 말을 만들어냈고, 전자만 철폐하면 후자는 남아 남성이 피해를 보게 된다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여성 페미니스트가 후자까지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입장에서 내가 부당한 것만 말해도 개욕을 먹는 세상인데, 남의 부당까지 오지랖을 떨면 곱게 들어 주나? 후자의 것들은 남성들이 요구를 하고 얻어 내야하는 것이다. 이 싸움의 대상은 누구인가, 바로 인식과 사회적 합의다. 나 스스로가 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동참을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콘돔의 발명으로 여성의 성이 온전히 자율권을 갖게 된 1960년대에 페미니즘은 발생했다. 오늘날 68혁명이라 불리는 운동의 시발점이었던 곳은 프랑스의 낭테르 대학이다.

페미니즘의 역사는 자생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부조리한 사회적 시스템과 불공평한 권위적 관계에 반기를 든 1960년대 청년 운동의 한 축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콘돔은 이미 고대 이집트에 있었고, 피임용 고무 콘돔은 1839년에 나왔다. 아직 1839년엔 여성이 선거권도 없었던 때로, 콘돔의 발명이 여성의 성에 자율권을 부여한 것이 아니다. 사실 이 김태훈이 말하는 ‘성의 자율권’이라는 것이 정의가 없는 말이라 딱히 반박이 불가하다. 섹스를 거부할 권리인지, 쾌락으로 섹스를 즐길 권리인지, 혼외 섹스의 자율인지, 남성 선택의 자율인지.

페미니즘의 역사에 대해서는, 이미 캐서린 햅번도 1942년 “페미니즘 운동(feminism movement)”라는 영화를 만들었고, 여성의 권리에 대해서는 15~17세기 관련 저작들이 있다.

사실 이 내용들은 그냥 위키만 검색해도 나오는 이야기들이고, 쉽게 알 수 있는 사실들이다. 소위 팝 컬럼니스트에 사랑에 대한 여러 저작들을 여러 권 써 낸 이가 이런 사실들에 대해서는 무지했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무뇌아적인 남성들이 전면에 도열해 있지만 결국 빅브라더는 공장으로 지탱되던 초기 자본주의였던 셈이다. 비겁한 변명이 아니다. 역사책에 다 나와있다. 그래서 현재의 페미니즘은 뭔가 이상하다. 아니, 무뇌아적인 남성들보다 더 무뇌아적이다. 남성을 공격해 현재의 위치에서 끌어내리면 그 자리를 여성이 차지할 거라고 생각한다.

군 가산제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이데올로기가 그렇다. 공평함의 문제는 사라지고 누가 더 유리한가의 문제만 남는다. 당연히 남자들은 반발한다. 교육의 힘으로 참고 이해하려 했던 남녀평등의 문제를 넘어 자신들의 생존이 걸리는 순간 강력히 저항한다. 살아야 한다는 동물적 본능 때문이다. 남성연대와 ‘일베’가 바로 그 증거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이전에, 이젠 전설이 된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이 있었다. 영화 속에서 배트맨에게 멱살을 잡힌 조커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나를 만들었고, 나는 너를 만들었다!” 방향이 틀어진 페미니즘은 또 다른 괴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평등의 문제가 사라진 채 패거리의 이익만이 걸린 발언들이 쏟아질 때, 필연적으로 그 이익에 반하는 집단들은 새로운 광기로 무장한다. 우리에게서 공평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마 김태훈은 이런 비판들에 이 첫 인용구(문단 구분은 내가 했음)로 자신의 진정성을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전술하였으니 할 것이 없고, 그의 예상 변명 정도로만 보고 다음 문단을 보자. 이 문단은 그저 면피용이었음이 드러난다.

‘군 가산제’는 전역한 남성이 군역의 보상을 받는 제도가 아니다. 군 제대한 남성 전체의 극소수인 공무원에 응시하는 경우만 받을 수 있는 제도다. 일반 회사에서는 채용에 군 가산점을 주고 있지 않으며, 대기업도 없는 곳이 많다. 즉 군 가산점 제도에 대한 반대는 페미니스트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반대를 해야하는 것이고, 오히려 군대 내 환경, 사회 환경을 개선하도록 하는게 더 옳은 방향이다. 이미 강한석 소장의 병영 출퇴근제 도입 사례는 이런 방향에서 볼 수 있겠다.

의례 군 가산점제의 논란에서 군대를 임신과 등가로 놓는 멍청이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멍청한 소리를 했고 그 사람이 어떤 집단에 속해 있다고 해서 그 집단 전체로 확대하는 것은 당연히 또 다른 멍청한 소리일 뿐이다. 멍청한 국회의원도 있고 멍청한 시장도 있고 멍청한 선생도 있고 멍청한 교사도 있고… 멍청이는 어디에나 있다. 그렇다고 인간이 다 멍청하다고 할 수는 없잖나.

<배트맨>에 나온 “너는 나를 만들었고, 나는 너를 만들었다”는 궤변이다. 일베가 페미니스트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믿는 자신의 주장을 확증하는 궤변이다. 일베는 일본 극우의 연장선에서 <거리로 나온 넷우익>, 박가분의 <일베의 사상> 등 이미 나온 여러 분석들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사회적 분노를 약자에게 쏟아내는 부류가 집결한 것이며, 인정 욕구가 결합해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게 분출되는 ‘현상’을 반대 방향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십분 인정한다고 해도, 페미니즘이 일베를 만들었다면, 페미니즘을 만든 것은 무엇인가. 일베인가?

김태훈의 글 뒷 부분에서

자리를 바꿔봐야 또다시 똑같은 지배와 피지배가 있을 뿐이다. 문제는 불평등을 조장하는 시스템에 있는 것이다. 싸워야 될 적은 남녀가 아니라 이 빌어먹을 시스템이다. 남과 여를 나누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고, 대졸자와 고졸자에 서열을 매기는 시스템 말이다.

라며 수습을 시작하는가 싶었는데, 이내 다시

어쩌면 이제 사이비 페미니스트들은 가까운 미래에 바보 같은 남자들이 아닌 칼라시니코프 기관총을 든 진짜 테러리스트들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라면서 멘붕에 이르른다. ‘사이비 페미니스트들’이 IS로 간 전사가 된 김 군 등이 총을 들고 나타나서 진짜 싸움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망상.

편을 가르고 서로 싸우게 해서 그 이득을 취하는 것은 교활한 장사꾼들이다. 오늘날 자칭 무슨 주의(主意)를 떠들어대며 회원들의 회비와 후원금을 받아 챙기는 단체들과 협상이나 타협도 없이 무한정 치고받는 싸움터를 만들어 관객을 모으는 TV 프로그램들이 그들이다. 우리에게 사랑과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뭔가 알 수 없는 은유를 통해 두리뭉실하게 퉁치고 대충 수습하는 문단에 이르러서는 이제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부분이 무언가 궁금하게 된다.

무지와 지적 태만의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