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라이프와 등급 분류의 추억

2000년에, 한창 한국에서 카운터스트라이크(Counter Strike)가 유행하던 시절, 한빛소프트에서 하프라이프(Half-Life)를 재출시했더랬다. 원본 하프라이프는 국내에서 워낙 안 팔려서 재고가 잔뜩이었는데, 갑자기 카운터스트라이크 붐이 몰아치면서 판매량이 급증하자, 새로 패키징을 해서 출시를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등급분류에 따르면 게임에서 ‘피’가 나오면 18세 분류를 받게 되는데, 당시 하프라이프(카운터스트라이크)를 즐기는 플레이어들 중 상당수가 19세 이하였기도 하고, 이전 스타크래프트의 출시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PC방에서 게임을 할 수 있게 하려면 18세 분류를 받아서는 안 되었다. 해서 나온 묘안이 먼저 출시한 독일 버전을 약간 개조해서 15세 버전을 만드는 것이었다.

독일은 당시 한국과 매우 비슷한 등급 분류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후반부 연구소를 진압하러 등장하는 적을 군인이 아니라 로봇으로 바꾸고 총에 맞으면 볼트가 튕겨나오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었는데, 한국 버전 15세에서는 아마 이것을 사람은 유지하고 볼트가 튕겨나오는 것으로 절충을 했던가 그랬다. (잘 기억은 안 난다. 우유가 튀게 했던가…?)

오늘, 그 하프라이프의 독일 버전이 19년 만에 피가 튈 수 있게, 규제가 풀렸다고 한다.

요즘 한국 게임에서 등급 분류에 이 기준이 좀 약해졌는지 아니면 내가 더 이상 미성년자 등급을 신경쓸 필요가 없어서 못 보는 건지 모르겠지만, 19년 만이라니 감회가 새롭다. 17년 전 유통사에서 일 했던 기억이다.

하프라이프와 등급 분류의 추억

한국 FPS 시장에 카운터스트라이크가 미친 악영향

넥슨의 카운터스트라이크 온라인(이하 카스, 카스온)이 내일(12월 20일) 클베를 시작한다고, 온 사방군데 광고가 뜨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문득 이 광고들을 보고, 아니 사실은 카운터스트라이크 소스도 아니고 1.6을 온라인으로 만든다는 뉴스를 접하고 ‘카스의 망령’이 떠올랐다. “아니 카운터스트라이크 1.6이라면 내가 7년 전 ㅇㅇ소프트에 있을 때 마케팅하던 그 카스 1.0이 아닌가!”

1998년 하프라이프가 시장에 나오고 나서 ‘올해의 게임’으로 뽑히는 등의 파란이 있었고, 몇 개월 뒤 공개된 하프라이프 MOD 카운터스트라이크 1.0은 이후 7.0까지 버전업이 된 후 밸브에 흡수되었다. 이어 2000년 시에라온라인에서 정식 패키지 버전 카운터스트라이크 1.0을 발매하게 되는데, 그 1.0이 1.1, 1.2를 거쳐서 1.6까지 개선된 것이 오늘날의 1.6, 소위 ‘쩜육’이다.

당대를 풍미한, 이 게임은 2002년 쯤 국내에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지만, 밸브가 스팀이라는 온라인 퍼블리싱 시스템을 만들면서 국내 PC방과 과금 체계 등으로 문제를 일으키자 이 기회를 틈타 스페셜포스라는 게임이 나타나 뒤를 잇게 된다. 스페셜포스는 쩜육과 거의 같은 내용으로 만들어졌지만 그래픽이 매우 조악했고 당시 FPS 수준에서 볼 때 별로 주목받기 힘든 게임이었다. 하지만 PC방 관련 협회들은 우리 힘을 무시하냐며 ‘국내 실정을 무시하는 카스는 이제 PC방에서 못한다, 우리는 스페셜포스를 공식 게임으로 후원하겠다’며 PC방 손님들에게 노골적으로 권하기 시작했고, 2003년쯤 ‘대세’를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던가 이런 대세 분위기도 잠시, 스페셜포스도 국내에서 인기를 좀 끌기 시작하자 두 퍼블리셔 사이에서 분쟁이 발생했고, 마치 프리스타일의 경우처럼 양쪽으로 갈리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 틈을 타서 지금까지 대세를 타는 ‘서든어택’이 명함을 디밀기 시작했고 주춤거린 스페셜포스를 떠난 플레이어들이 ‘그래픽이 조금 나아진 스페셜포스’인 서든어택으로 몰리게 된다.

하지만 두 게임은 모두 카운터스트라이크를 베이스로 하고 있는 게임이라, 카스식의 플레이를 그대로 지원하고 있을 뿐 전혀 시스템적인 개선이라던가 ‘폭파’이외의 새로운 게임 방식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형만한 아우가 없다더니, 그나마 카스는 패키지 1.0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인질 구출이나 VIP 호위, 탈출 같은 다양한 게임 방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카스 이후에 만들어진 점령(배틀필드1942)이라던가 전차 호위(울펜슈타인ET) 같은 신선하고 획기적인 방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웃기게도, ‘Fire in the hole’이라는 구멍에 수류탄 던지며 외치는 이 문장이 카스로 인해서, 마치 ‘무조건 수류탄을 던지면 Fire in the hole’이라는 양 잘못 전달되기까지 했다. 사실 ‘Fire in the hole’은 광산 갱도에서 폭약이 폭발하거나 참호 같은 좁은 곳에서 폭발물이 터지는 걸 주변에 경고하는 말이지, 수류탄을 전질 때는 ‘throwing granade’라던가 ‘frag out’ 같은 좀 더 일반적인 문장이 사용되는데도. (그래서 최근 ‘전방 수류탄’이라던가 ‘수류탄 투척’ 같은 표현이 사용되는게 그나마 다행이기는 하다. 이 내용은 위키피디아에서 ‘fire in the hole’로 검색해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어쨌든 이런 덕분에, 한국 FPS는 ‘닥치고 폭파(폭설)’ 스타일이 정착되게 됐고, 최근에 아바에서 전차 호위를 따라하면서 국내에는 처음 소개됐다는 듯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게 됐다. 물론 그랬거나 말았거나 플레이어들은 여전히 폭탄 설치(폭설) 게임을 더 많이 즐기고 있지만.

이런 역사를 만든 쩜육이, 1998년에 나왔던 카스쩜육이, 카스온으로 2007년 부활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해당 담당자는 ‘자신있다’며 쪽지를 날려왔지만, 난 이렇게 카스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이 두렵다. 지난 10년간 FPS의 발전을 한 큐에 원점으로 되돌리는 카스온의 등장이 과연 한국 FPS 시장에 바람직한 것일까. 자랑스레 ‘새로운 기획이 많다’며 이야기를 해준 분께 ‘쩜육 온라인이라니!’라고 흥분했지만, 시장성의 면에서 카스온이 실패할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 동남아시아에 여전히 대세를 이루는 쩜육, 그리고 중국의 수십만 동접자를 생각해보면 카스온은 성공할 것이다. 그래서 난 굉장히 걱정하고 있다.

  • 소스: 하프라이프2 엔진을 기반으로 하는 게임들. 이후 소스가 엔진으로 독립한다.
  • 폭파: 정해진 위치에 폭탄 설치(폭설)를 해서 폭파시키거나 설치한 상대의 폭탄을 시간 내에 해체해야 한다.
  • 인질 구출: 테러리스트들은 몇 명의 인질을 데리고 있고, CT는 인질을 구출해서 데려와야 한다.
  • VIP호위: 플레이어 중 한 사람이 VIP가 되고 VIP가 죽으면 게임이 끝난다. 목적지까지 탈출하기.
  • 탈출: 정해진 목표 지점까지 한 사람이라도 도달하면 된다.
  • 점령: 정해진 지역을 일정 시간 점거하면 아군 지역으로 바뀌고, 맵 전체를 아군 지역으로 바꾸거나 일정 점수를 획득하면 승리한다.
  • 전차 호위: 전차를 파괴하는 쪽과 파괴당한 전차를 수리하며 전진시키는 쪽으로 나뉘고, 전차가 목적지에 도달하면 승리한다.
한국 FPS 시장에 카운터스트라이크가 미친 악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