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건 다 틀렸…나?

“Listening to Kristina made me realize that I hadn’t been having good ideas. I realized that I had been working with people who think too similarly to myself, who draw on the same cultural references (geek culture), who use the same game design theory that was developed mainly by (white, male) gamers for (white, male) gamers. I realized that I was stuck. This is what happens when everyone is the same as each other. We make boring things.”

– Video Games Are Boring: Maybe everything we know is wrong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컴퓨터라는 걸 구경해보지 못한 제3세계의 사람들부터 스마트폰으로 전화만 하는 사람들, 게임 속 세상을 구하는데 열중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게임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거나, 게임으로 교육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까지도 있다. 대체로 게임 산업은 후자의 ‘믿음(mutual trust)’을 가진 사람들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사피엔스’를 읽은 이후로 이 ‘믿음’이라는 개념으로 많은 것들을 해석하고 있는 느낌이지만, 아무렴.)

인용문의 브리(Brie Code)는 이 ‘믿음 밖의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사실 인류 전체의 통계로 보자면 이 게임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실제로 게이머라고 통계로 잡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에 십 분 ~ 이십 분 점심 시간을 비주얼드 같은 캐주얼 게임으로 시간을 때우는 정도 플레이 한다. 나나 우리처럼 하루에 수 시간 ~ 십여 시간 동안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임교 신자’들 외곽의 세상이다.

여기서 우리는 판단을 해야할 것이다. 저 ‘불신자들’을 신자로 만들어 ‘진짜’ 게임에 빠지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신자들만을 위한 게임을 계속 만들 것인가.

사실 나는 게임으로 현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쪽이고, 그런 게임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쪽이(되었)지만, 그런 영역의 게임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레벨’이라느니 ‘전투’라느니 하는 개념과는 거리가 먼 거의 규칙만 존재하는 게임들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단순한 규칙들로 일정한 ‘플레이’를 거치면서 플레이어가 직접 생각하고 깨닫게 하는 쪽.

하지만 이미 신자들의 세상은 거대하고, 이만으로 충분히 이 현실 세계의 삶을 영위할 직업을 유지할 수 있다. 두 서로 다른 세상이 있는데, 한 쪽에서 다른 쪽을 보면서 ‘아 이 세계는 쓸모 없는 세계야’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브리도 이런 것을 어느 정도 깨닫고, 마지막 문단처럼, 이 두 세계의 브릿지가 될만한 새로운 일을 만들어 보기로 한 것이겠지만.

게임 문법과 ‘가상의 실재’

게임은 말하자면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세계관의 공유’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세계관’이라는 것은 사피엔스에서 말한 ‘가상의 실재’와 비슷한 개념이다. 플레이어는 게임이 창조한 일시적인 공간(instance world: 마치 MMO 게임 안에 존재하는 ‘인던’ 같은 공간)에서, 이 공간을 지배하는 (실재하지 않는) 규칙과 질서에 동의하고 빠져들어 이 규칙에 따라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이다. 즉 게임이란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개발자와 플레이어가 합의한 가상의 공간이고, 이 공간에 플레이어가 얼마나 동화되느냐에 따라서 플레이를 지속할 수 있느냐가 결정된다.

따라서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이 규칙을 명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보는 즉시 이해할 수 있게’ 보여줘야 하고, 이 규칙에 따를 때는 점수로 보상을 주고 따르지 않을 때는 패널티를 부과하는 것으로써 플레이어가 규칙 안에 존재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 규칙은 대체로 이전에 존재했던 다른 게임들이 만들어낸 규칙이나 관념들을 승계한다. 예를 들면 투사체의 궤적(총알이 날아가는 것이 보임), 물약을 먹으면 회복된다거나, 캐릭터가 자신의 키보다 높은 곳으로 뛸 수 있다거나, 생명체에는 가시적이고 수치화된 HP가 있다거나, 착용한 아이템을 바꿔입거나 소지품을 확인할 때 시간을 멈출 수 있다거나 하는 것들이 대표적이다.

이런 규칙들은 현실의 규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각 게임 공간은 각 게임이 나름대로 만들어낸 ‘가상의 실재’가 있고, 이것은 다시 커다란 게임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게임들끼리 서로 공유하는 ‘가상의 실재’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게임의 문법’이라거나 ‘게임적 표현’이라고 불러 왔다.

사피엔스를 읽는 중에

어제 저녁부터 <사피엔스>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은 인류가 어떻게 진화했고 적응했고 이종들을 멸종시켰고 자신들이 진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망가졌는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인류에게는 인지 혁명, 농업혁명, 과학 혁명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 중 인지혁명이 있은 이후 인류가 ‘가상의 실재’라는 것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를 하고,

인지혁명 이후, 사피엔스는 이중의 실재 속에서 살게 되었다. 한쪽에는 강, 나무, 사자라는 객관적 실재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신, 국가, 법인이라는 가상의 실재가 존재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상의 실재는 더 강력해졌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강과 나무와 사자의 생존이 미국이나 구글 같은 가상의 실재들의 자비에 좌우될 지경이다. (p49)

이 가상의 실재는 ‘상호 주관’을 통해서 ‘공통적으로 믿어지는 것’들이라고 정의하며,

상호 주관이란 많은 개인의 주관적 의식을 연결하는 의사소통망 내에 존재하는 무엇이다. 단 한 명의 개인이 신념을 바꾸거나 죽는다 해도 그에 따른 영향은 없지만, 그물망 속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거나 신념을 바꾼다면 상호 주관적 현상은 변형되거나 사라진다. 상호 주관적 현상이란 악의적인 사기나 하찮은 가식이 아니다. 방사능 같은 물리적 현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지만, 세상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할 수 있다. 역사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인 중 다수가 상호 주관적이다. 법, 돈, 신, 국가가 모두 그런 예다.

푸조는 그 회사 CEO의 상상 속 친구가 아니다. 수백만 명이 공유하는 상상 속에 존재하는 회사다. 그 CEO가 그 회사의 존재를 믿는 것은 임원들, 회사의 법률가들, 근처 사무실의 비서들, 은행의 출납계원들, 주식거래소의 중개인들, 프랑스에서 호주까지 전 세계에서 근무하는 자동차 딜러들 역시 그 존재를 믿기 때문이다. 만일 CEO 혼자서 믿음을 갑자기 버린다면, 그는 신속하게 가장 가가운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달러와, 인권, 미국은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수십억 명이 공유하는 상상 속에 존재한다. 한 개인은 누구라도 그 존재를 위협할 수 없다. 만일 나 혼자 달러나 인권, 미국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해도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런 상상의 질서는 상호 주관적이며, 이를 변화시키려면 수십억 명의 의식을 동시에 변화시켜야 한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대규모 변화가 일어나려면 정당이나 이념운동, 혹은 종교적 광신집단 같은 복잡한 기구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복잡한 기구를 만들자면 서로 모르는 많은 사람을 협력하게 만들어야 하고, 그런 일은 오로지 그들이 뭔가 신화를 공유하고 있을 때만 일어난다. 그러니 현존하는 가상의 질서를 변화시키려면 그 대안이 되는 가상의 질서를 먼저 믿어야 하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푸조를 해체하려면 프랑스 법률체계처럼 그보다 더 강력한 뭔가를 상상해야 하고, 프랑스 법률체계를 해체하려면 그보다 더 강력한 무엇, 예컨대 프랑스라는 국가를 상상해야 한다. 국가마저 해체하려고 한다면, 그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를 상상해야 할 것이다.

상상의 질서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우리가 감옥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실상은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일 뿐이다. (p131)

이제는 이를 빠져나갈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인류(사피엔스)는 이제 현실 위에 가상의 실재, 즉 믿음 위에 존재하는 것들을 통해 서로의 관계를 구성하고 있고, 이것들이 만들어낸 질서에 의해서 통제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 질서를 바꾸기 위해서는 새로운 질서의 꿈을 꾸고 그 꿈을 모두가 믿게하는데 달려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대 사회의 질서를 바꾸기 위해서는 ‘사회 변혁’이라는 꿈(새로운 가상의 질서)을 많은 사람들이 믿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런 관점에서 지금 현실을 돌아 보자면 ‘사회 변혁’에 대한 믿음이 이제 거의 무너진 상태이므로 가능성이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다른 글, 스켑틱(Skeptic)에 실린 <테러리즘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들(Myths of Terrorism)>이라는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의 글에는 이런 인용 부분이 나온다.

체노베스는 이어서 “이런 추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강화된다. 지난 50년 동안 시민 저항 운동은 그 효과도 강력해지고 빈도도 지속적으로 증가했던 반면에 폭력적 투쟁은 점차 횟수도 줄고 대부분 실패했다. 비폭력 저항이 실패할 것으로 여겨지는 극도로 억압적인 권위주의 독재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비폭력이 폭력보다 목적 달성이란 측면에서 더 뛰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민중의 힘”이라고 체노베스는 말한다. 그러면 얼마나 많은 민중이 저항에 참여해야 하는가. 그녀의 데이터에 따르면 “일단 전 인구의 3.5%가 능동적이고 지속적으로 참여한 저항운동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으며, 많은 경우 그보다 작은 참여율로도 성공했다.” 또한 “실제로 3.5%의 문턱을 넘어선 모든 투쟁은 비폭력적인 것이었다. 순전히 비폭력 수단에 의지한 투쟁의 규모는 평균적으로 폭력적 투쟁의 네 배였다. 그리고 성별, 연령, 인종, 정치세력, 사회계층, 그리고 생활 영역권에서의 대표성도 훨씬 높았다.” (Stephan and Chenoweth, 2008, 인용의 재인용)

일반적으로 사회적인 인식이 변화하는 기점을 60% 정도로 보는 관점이 있는데, 이 60%를 만들어내는 것은 3.5%의 사람들이 ‘능동적이고 지속적으로 참여한 운동’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이렇게 만들어진 3.5%의 지속적인 투쟁으로 60%의 인식을 만들어 내면, 기존에 만들어진 ‘믿음’이나 ‘질서’를 바꾸게 되는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이다. 지금까지의 변혁이라는 것들이 이렇게 형성되었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