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개발 노동의 특수성

게임개발자연대가 3년을 공을 들여서 여러 정당 및 단체들(정확히는 정의당, 노동건강연대, 한국IT노동조합)과 연합해서 드디어 넷마블 및 게임 업계의 노동 실태를 만천하에 공개하고 공론화를 하는데 성공했다. 개발자들의 갈수록 더 열악해지는 노동 상황 뿐만 아니라 산업의 실태에 대해서도 많이 알려졌고, 이제 가장 기본적인 ‘노동법 준수 필요’라는 공감대는 만들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저항하는 기사들이 나오는데,

아직 일부 게임회사들은 개발자들을 채용할때 프로젝트 단위로 채용한다. 개발자들이 특정 회사에 직원으로 고용되기 보다는 팀 단위로 특정 프로젝트 별로 회사를 옮겨다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회사는 이 개발자들의 근무태도나 중간성과를 관리하지 않는다. 근무를 몇시간 했는지도 회사의 관여사항이 아니다.

정해진 기간에 결과물을 내면 된다. 결과물의 질이 근무태도나 근무방식에 대한 평가다.
실제로 게임회사에서는 자율성과 창의성을 중요시한다는 이유로 갑자기 조기퇴근하겠다는 개발자, 오늘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다는 개발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과연 그들은 조기퇴근에 대해서 얼마나 큰 책임을 졌을까. 그들이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하면 회사는 그 시간만큼 월급을 주지 않았을까. 꼬박꼬박 월급을 주면서도 약속한 기간에 결과물을 받지 못하는 회사의 속은 얼마나 쓰릴까. (중략)

9시 출근-6시 퇴근이라는 일반적인 룰을 ‘창작자’인 개발자들에게 모두 적용하는게 맞는지, 그게 맞다면 개발자들은 그 룰을 받아들일 자세가 돼 있는지, 그것이 개발자들의 창의력을 오히려 떨어뜨리지는 않는지…먼저 따져볼 일이다.

게임업계 근로관행, 개발자들도 변해야 바뀐다, 파이낸셜 뉴스

이런 식으로 게임 개발 노동의 특수성을 운운하는 기사들이다.

이재홍 숭실대 문예창작과 교수(한국게임학회장)는 “게임은 종합 문화예술로 불릴 만큼 예술적 창작 요소가 많은 제품”이라며 “개발 과정에서 몰입이 굉장히 중요하고, 이 때문에 고정된 근무 시간에만 일을 하라고 강제하는 것도 다소 무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에선 노동 환경을 개선하되, 게임 산업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승훈 교수는 “지나친 야근이나 촉박한 일정은 당연히 개선돼야 하겠지만, 근무 시간을 획일적으로 정하는 식의 감독은 게임 산업에 맞지 않는다”며 “게임 개발자의 문화를 이해하고 유연하게 정책을 집행하는 게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툭하면 밤샘 게임업계 ‘크런치 모드’ 언제까지, 중앙일보

저 분들이 이야기하는 저런 개발자들은 2002~2005년 쯤에 온라인 게임 개발 붐이 일었을 때, 게임 개발에 환상을 가지고 업계에 들어 온 개발자들이 하던 이야기다. 요즘 게임 개발 저렇게 하는 곳은 거의 없다. 다들 오전에 출근해서 (회사가 강요하지 않으면) 저녁에 퇴근하(고 싶어하)고, GIT 등을 통해서 업무를 체크한다.

게임 개발을 자꾸 종합 예술이니 창작이라느니 갖다 붙이면서 ‘노동’을 일부러 지우려고 하는데, 예술이니 창작이니 할 수 있는 사람은 솔까 산업 전체에 5%도 안되는 최상층부의 디렉터급에나 해당하는 소리일 뿐, 매일 매일 일정 소화해내는 하층 개발자들은 그런 거 별로 없다. 게다가 게임을 예술이라고 칭할 때는 게임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 그 (개별 작업자들의 작업인) 특정 캐릭터 한 명의 생김이라든지 대사 한 마디, 기능 하나 가지고 요소라고 하는 거였나? 생각해봐라.

심지어 요즘은 한국의 인디 게임도 이젠 창작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보다 하루하루 생존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특히나 매일 밤을 새면서라도 일정을 당기지 않으면 생활비를 만들 수 없는 인디 개발자들에게 창작이니 예술이니 하는 소리는 배 부른 소리다. 이번 게임 망하면 개발 접고 외주를 뛰든 노가다라도 뛰어야 되는 상황인데 지금 창작이니 예술이니 하고 앉아 있다.

저렇게 산업 현장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나가서 업계 사람들이 전하는 소리만 듣고는 특수성이니 운운하는 건 정말 심각한 문제다.

게임 개발 과정은 노동이고 결과가 (낮은 확률로) 예술이 되는 거다. 게임이 예술이 되는 건 결과일 뿐이다.

특히나 현재 한국 게임 산업에서 예술이라고 불릴만한 게임이 일 년에 몇 개나 나오나. 연간 손에 꼽히는 사례를 가지고 마치 나머지 게임들이 전부 예술인 것처럼 확대하고 호도하는 것은 또 무슨 짓인가. 볼쌍사납다.

  • 어디에서나 ‘특수성’ 운운하면서 ‘일반성’을 부정하고 지우는 사람들이 있다.

크레딧잡

크레딧잡은 국민연금 가입 데이터를 통해서 기업의 종사자 연봉 정보를 제공하는 사이트였다. 국민연금은 소위 ‘4대 보험’중 하나로, 정규직 노동자가 당연히 가입(해야)하는 고용보험, 건강보험, 국민연금, 산재보험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이 국민연금 데이터를 보면 어떤 회사의 정직원 숫자(가입자)와 해당 직원의 연봉(소득) 구간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데이터를 이용하면 법인명(회사 이름)을 가지고 직원들의 분포가 어떤지를 파악할 수 있게 역산할 수 있어서, 이를 기반으로 만든 사이트가 크레딧잡이다.

문제는 연봉 정보의 공개를 가지고 일부 기업들이 민원을 넣었고, 이에 따라 정보 공개를 중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직원의 연봉 정보 공개에 대한 부분을 가지고 기업들이 민원을 넣었다는 것이다.

여긴 크게 세 가지의 관점을 가져야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국민연금 납입 정보를 왜 기업의 민원으로 중단하느냐 하는 것이다. 국민연금 납입을 노동자 개인이나 기업이 자의적으로 중단할 수 있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이것은 국가가 법으로 보장/강제하고 있는 것이고, 정직원으로 취업을 하게 되면 당연 가입되는 것으로써, 심지어는 직업이 없어도 납입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의 민원 유무로 이 정보 공개가 중단된다는 것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둘째로, 이 국민연금에 가입되는 연봉은 구간에 따라서 구분된다. 소득 금액의 범위에 의해서 납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연봉을 특정할 수도 없고 따라서 개개인을 특정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이는 개인 정보와는 관계가 없고, ‘민원에 대응한다’는 부분은 어불성설이다. 연봉 정보가 어느 구간에 해당하는지를 파악할 수 없게 하려면 450만 원 쯤 월급을 줘서 정확하게 어딘지 파악 못 하게 하면 될 것 아닌가?

셋째로, 원래 기업들은 직원들의 연봉 공개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다. 아주 간단하게 러프하게 비유를 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저 일 잘하는 사람(A)이 연봉을 100원 받는다.”, “저 일 못하는 사람(B)이 연봉을 200원 받는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원래 직원들의 연봉이 공개되지 않을수록 직원과 연봉 협상을 하는데에 유리하다. 애초에 이런 정보의 불균형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협상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직원 A든 B든 연봉이 공개되지 않아야 다른 직원의 연봉을 싸게 후려칠 수 있고, 부당하게 많은 연봉을 주는 직원의 정보를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연봉을 공개하는 것은 일종의 고용자(기업)-피고용자(개인) 사이의 신뢰 문제인 것이지, 이것을 공개하는 것이 불법은 아니다.

그리고 또한, 양자간의 ‘합의(계약)’에 의해 공개치 않기로 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익명(개인을 특정할 수 없게)’으로 공개하는 것은 원래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이런 연봉의 범위를 통계로 만드는 것은 더더욱 문제가 없는 일이다.

결론을 내자면,

한국은 역시 기업하기에 너~어어~무 행복한 나라라는 것이다. 직원들의 연봉 정보가 이렇게 공개되는 것도 ‘공단’에 압력을 넣어 멈출 수 있고, 법인세도 국가에서 계속 감면해주고, 국가가 기업에 해고의 자유도 계속 확보해주는 데다가, 심지어는 파업에 대해서도 불법으로 만들어주고 노동자 착취를 아주 편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나라다.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국가가 직접 도와주는 이런 나라가 전세계에 몇이나 있겠는가!

노동자는 대한민국에서 국민이 아니다. 국민으로 간주된 적이, (저들이 말하는) ‘건국’ 이후로 없었다.

이익균점권

‘이익균점권’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글을 우연히 보게 됐다. 장석준 선생이 <고래가 그랬어>에 기고한 글이라고 하는데, 이 부분이 눈에 띈 것이다.

옛날 헌법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단다. “제18조.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서는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 어려운 말들이 많지? 고래 친구들에게 친숙하게 바꾸면 이런 이야기야. “상품을 만들어서 돈을 버는 회사들에서는 노동자도 이익을 공평하게 나눠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들이 회장님을 위해 일을 해주고 월급을 받아가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이야기지. 노동자들도 회장님과 함께 회사가 벌어들인 이익을 고르게 나눠 가져야 한다는 말이야.

그래서 관련된 여러 글을 찾다가 이런 내용을 발견했다.

1948년에 제정된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 즉 제헌헌법에는 노동자의 ‘이익균점권’을 규정한 조항이 들어 있었다. 제헌헌법 제18조 제2항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체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해서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라고 명시하고 있었다. 여기서 ‘이익균점권’이라는 것은 물론, 노동자들이 노동의 대가로 단순히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순한 임금 차원을 넘어서, 노동자는 기업 활동에 의한 성과를 자본가와 동등한 자격으로 고르게 나눠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규정한 조항인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되돌아보면, 제헌헌법의 이와 같은 조항은 실로 획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이 헌법조항이 실제로 현실에서 반영된 적은 없었다. 정부 수립에 이어 곧장 동족상잔의 대규모 전쟁이 터졌고, 휴전 이후에는 독재정권들에 의해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라는 헌법의 핵심적인 요소는 끊임없이 무시되고 유린되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서 ‘이익균점권’이라는 헌법조항이 사실상 사문화돼버린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신경이 쓰였던지 박정희 정권은 헌법을 개정하면서 이 조항을 아예 말소해버렸다. 그 결과, 일반시민들은 대한민국이 애초에 이러한 매우 ‘진취적인’ 조항을 가진 헌법 밑에서 출발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살아왔다. 이 무지상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제헌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이 ‘이익균점권’ 조항이 건국 당시의 혼란한 정세 속에서 단순히 외국의 헌법(들)을 베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당시의 국회 속기록은 이 조항이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정파 사이의 여러 날 동안의 치열한 논쟁 끝에 성립된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원래 이 조항을 주도적으로 제안한 이는 대한민국 초대 내각의 사회부장관이기도 했던 전진한(錢鎭漢)이었는데, 그는 처음에 노동자의 ‘이익균점권’뿐만 아니라 ‘경영참가권’까지 헌법에서 명시해야 한다고 제안·주장했다. 그러나 며칠 동안의 격렬한 토론 과정에서 ‘경영참가권’은 통과에 실패하고, 그 대신 ‘이익균점권’은 관철될 수 있었다.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은 물론 오늘의 상황과는 많이 달랐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친일파 지주계급 출신들이 압도적 권력을 차지하고 있던 상황에서 ‘경영참가권’이나 ‘이익균점권’ 등 매우 진보적인 아이디어가 공개적으로 제안되고 그것이 국회의사당에서 활발히 토론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노동자의 경영참가권은 끝내 부정되었지만, ‘이익균점권’ 조항이 성립됐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제헌국회의 모습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선진적인’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익균점권’이라는 아이디어는 근년에 우리사회 일부에서 조심스럽게 논의되다가 꼬리를 감춘 소위 ‘이익공유제’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임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이익공유제라는 아이디어에는 어딘가 대기업과 자본가의 눈치를 보는 왜소한 자세가 엿보이는 데 비해서 ‘이익균점권’ 개념에는 기업 활동의 결실을 나눠 갖는 게 어디까지나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라는 논리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 개념을 제시한 전진한의 논리는 명쾌했다. 그에 의하면, “노동을 상품시하여 자본에 예속시키는 것은 고루한 사상”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는 ‘노력’을 출자했다는 의미에서 자본가와 다름없는 자본가이며, 따라서 이윤을 균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얼핏 매우 급진적인 좌익사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진한은 대한노총이라는 우익 성향의 노동자단체를 세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반공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반대했던 것에 못지않게 자본주의 독재체제도 거부하는 ‘자유협동주의자’였고, 무엇보다도 평생 참선수행을 계속한 ‘탈속’의 정치가였다.)

– ‘국가의 쇄신, 개헌, 용기‘, 뉴스타파 포럼, 김종철

또 이런 기사가 있다.

전진한(1907~1972)은 이승만 정권 초대 내각의 사회부장관이었던 인물로, 좌익계 노동단체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을 와해시키기 위해 조직된 우익계 대한노총에서 이승만 총재 아래 위원장을 지냈다. 이를테면 노동계의 이승만 대리인이었던 셈. 이런 인물이었건만 그는 건국에 대한 국민 지지를 이끌어내고 통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와 농민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판단해 제헌헌법에 ‘이익 균점권’을 밀어 넣었고 이에 맞춰 한국전쟁 와중에 노동쟁의조정법 등 하위 법체계를 만든다.”

“이는 유진오 박사가 만든 제헌헌법 초안에 대한 전진한의 평가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담고 있는 초안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경제 분야는 취약하다고 봤다. 이어 “농민과 근로대중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실현하지 않는다면 헌법 초안은 사문화될 것”이라 경고한다. 그가 이익 균점권을 생각하게 된 배경이자, 보수 정치인들과 상공회의소의 집요한 반대를 물리치고 격론 끝에 관철시킨 이유다.”

– ‘제헌헌법 18조 ‘이익균점권’ 아시나요‘, 서울신문, 2011년 2월 16일자

그런데 이 조문(제정헌법 제18조)은 이후 개정으로 사라졌다.

한국 게임, 게임 산업은 왜 안 되는가

전자신문에 재밌는 기사가 났더랬다. 문화융성, 게임을 앞장세우자라는 제목으로, 한국이 중국에 뒤쳐지기 시작했는데 이걸 되돌려 게임산업을 중흥해야지 않겠냐는 취지의 기사다. 기사중 특별히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요즘 국내 게임사의 가장 큰 고민은 쓸 만한 인재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새로운 활력이 돼야 할 신입 개발자를 구하는 데 애를 먹는다.

능력 있는 젊은 개발자들이 게임업계를 취업 후순위에 두기 때문이다.

10여년 만에 닥친 이 같은 변화는 게임업계가 예전 만큼 젊은이들에게 성공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최근 몇 년만 돌아봐도 조그만 스타트업에서 큰 기업으로 성장한 예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가능성이 여전함에도 취업 선호도가 낮아진 것은 게임업계 위상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게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주입 받고 제재를 경험한 세대가 자신의 미래를 게임에 맡기기란 쉽지 않다.

인재를 찾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이건 사실 IT 전반에 걸쳐 같은 이야기들을 하는데, 이게 정말 사람이 없어서 인재를 찾지 못 하는 것인가 생각을 좀 해야지 않겠나. 마찬가지로 이 문제의 원인을 ‘게임업계의 위상이 낮아졌기 때문’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웃겨 쓰러질 뻔 했다.

노동 환경의 문제

일단 노동 환경의 문제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20년 전에 하던 박봉에 과노동을 ‘너희가 좋아하는 게임 만드는 일이니까 감수하’면서 요즘도 하라는 마인드인데 달라질 수가 있겠나.

간단하게, 15년 전 2천만 원은 신입에게 꽤 먹고살만한 연봉이었다. 담배 1500원이었고, 버스 200원, 밥값 3~4000원 했다. 월 실수령 150만 원 정도 받으면 집에 50만 원 보내주고 저축도 하고 풍족하게 살았다. 현재 2천만 원 받는 신입들은 두 배 이상 오른 물가에서 살고 있다.

그 20~15년 전에 신입으로 시작했던 사람들이 지금 30대 후반 ~ 40대 중반 쯤 됐고, 대부분 가족이 있다. 노동법상 평일 최대 주 12시간까지 초과 노동이 가능하다. 이 정도만 해도 애들 얼굴 보고 가족 얼굴 보고 살 수 있다. 그런데 어디 이렇게 일 해서 회사에서 눈치 안 받고 일할 수 있나? 일 12시간 노동 강요하는 회사들이 소위 ‘성공한 회사’라며 롤모델처럼 되고 있는데.

저년차 개발자들에게는 열정페이를 요구하고, 고년차 개발자들에게는 가능하면 싸게 노동해주기를 요구하고, 노동 시간은 최대한 많이 쓰기를 원하면서, 거기에 게임 퀄리티까지 잘 나오기를 바란다. 오, 게다가 나이 많다고 마흔 쯤 되면 잘 뽑지도 않아.

저기요, 노동시간과 경험이 게임 퀄리티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요, 통계가 그래요, 과학이 그래요. 구시대적 미신으로 게임 개발하는 꼰대 놈님들아.

성과 분배의 문제

위에 대충 언급한 열악한 환경에서 게임이 대박이 나고는 한다. 그래서 그런 회사들이 롤모델이 되고 투자 유치를 해서 더 잘 되기도 하고 그런 상황이다. 그리고 그런 모델을 성공 모델이라면서 다들 따라하고 서로 강요하고 그러고 있지. 거기까지는 뭐 그럴수도 있다고 치자.

그런데 정작 그렇게 고생한 노동자들은 인센티브를 얼마나 받았나? 난 연 1200억 쯤 벌었다는 모 게임 AD가 인센티브 200만 원 쯤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 소위 성공했다는 넷마블, 433 같은 회사들 개발자 실무진이 인센티브 얼마나 받았나 한 번 공개해주면 좋겠다, 꿈과 희망이라도 가지고 회사 다니게.

결국 노동 환경도 좆 같고, 암만 열심히 일 해봐야 보상도 없는데다가 수명도 짧대, 이런 산업으로 신입이 들어 오겠나?

산업의 위상이 낮아져서가 아니라, 노동 환경이 좆 같기 때문인 거다. 사람은 이미지로 선택을 하기 보다는 실질적인 계산으로 선택을 한다. 게임 산업은 좋은 직업이 아닌지가 오래 됐고, 그렇게 만든 책임들을 꼰대들과 자본가들이 져야겠지만, 뭐 그들은 이미 잘 먹고 잘 사는데 바꿀 필요가 있겠나.

그냥 계속 젊은 애들만 갈아넣으면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지.

집밥 논란

‘집밥’이라는 단어가 화제다. 백종원을 둘러싼 황교익의 ‘일침’이 있은 후로 그의 요리를 어떻게 봐야하는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그 중 내가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박권일 선생이 지적한 부분이다.

더 중요한 점은 백종원 신드롬을 불러온 사회환경이다. 왜 사람들은 백종원의 ‘집밥’, 그러니까 원래 재료가 아닌 대체재료, 속성 조리법으로 만든 음식에 저리 열광하는가? 좋은 재료를 확립된 레시피대로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면 어떤 음식이든 맛있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것이다. 그런 음식은 어마어마한 비용을 요구한다는 것, 따라서 그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라는 것.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겐 그런 음식을 만들 여유가 없다. 노동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긴 사회, 야근과 휴일근무가 일상인 나라에서 ‘집밥을 제대로 해먹는다는 것’은 또 다른 스트레스요 부담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크푸드를 배달시켜 먹기엔 눈이 너무 높아져 있다. 돈도 시간도 없는데, 그렇다고 싸구려처럼 보이는 음식은 먹기 싫은 대중의 심리를 백종원은 정확하게 꿰뚫는다. “자, 보세요. 있어 보이쥬?”

‘집밥’은 기본적으로 누군가가 집에서 음식을 차리는 비용 투자를 해야하는 것이다. 밥 차리는데에는 메뉴 구상, 재료 구입, 조리 시간, 식사 시간이라는 단계가 있고 각 단계마다 상당한 수공과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조리의 과정에서는 익히고 끓이고 볶고 하는 경우에는 각 10~20분, 까딱 조림 같은 것이라도 할려면 한 나절이다. 김치를 담그는 건, 특히 김장 김치를 담그는 건 배추를 사다가 절이고 속을 채 썰고, 풀죽을 쑤고 등등 이틀에 걸친 대작업이다.

부모님들의 세대, 그러니까 대략 80~90년대까지만 해도 집에서 가사 노동을 전담하는 사람이 있었다, ‘엄마’라고 부르는. 그 분들이 하루 종일 집에서 쓸고 닦고 가사노동을 하다가, 저녁이 되면 요리를 해놓고 퇴근하는 남편과 자녀들에게 따뜻한 밥을 해 먹이는게 일종의 미덕처럼 받아들여졌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 그 이전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게 당연했을 것이다. 그래서 ‘집밥’이라는 환상이 만들어진 거다.

노동 환격이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한, IMF 이후로 가사 노동에 시간을 쓸 여력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저 IMF라는 것도 이미 20년 전이다. 그 이후로 우리는 경제라는게 좋았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소위 소상공업 개인사업자들이 입에 달고 사는 “~때문에 경제가 나빠졌다”는 이야기는 허상이다. 호황이었던 적이 없었고, 노동 환경은 지속 나빠졌다.

맞벌이 가구가 전체 가구의 절반이다. 국가적인 저소득 상태에, 최장 노동 시간에, 젊은이들은 결혼을 포기할 정도로 취업이 안 되고 있고, 애초에 집에서 뭘 해먹을 여유를 못 갖는 상태다. 혼자 사는 사람은 그냥 밖에서 사 먹고 들어오는게 훨씬 비용과 시간 측면에서 저렴하다.

그래서 여기엔 크게 두 가지의 층위가 존재한다.

  1.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여성의 존재와 그에 대한 인식
  2. 소득 감소와 노동 환경의 변화

집밥의 논란에서 이 두가지가 매우 뒤섞여 있는 느낌이다. 페미니스트들은 1을 강조하고 노동 운동가들은 2를 강조한다. 반면 이 두 맥락을 전혀 못 짚은 구시대 꼰대들은 1과 2의 사이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집밥이라는 존재는 결국 속 편한 시절의 회상에 기반한 환상일 수 밖에 없다. 아침도 못 먹고 출근하는 맞벌이 가족에게 집밥이라는게 가당키나 한가.

미디어오늘에서 두 개의 흥미로운 기사를 냈다.

어뷰징 낚시기사 써봤더니 15분만에 10만원라는 기사는 언론사들이 품질 낮은 낚시 기사를 왜 쓸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설명인 기사이다. 요약하자면 그게 돈이 된다.

  • [2017년 4월 추가] Amanda Warner라는 사람이 Fake it To Make it이라는, 가짜 뉴스를 만들어서 돈을 버는 것을 소재로 한 시리어스 게임을 만들었다.

또 다른 기사인, 힘들고 위험한 일은 ‘물량팀’에… 얼마나 죽는지도 몰라는 금속노조에서 발표한 조선 업계의 ‘물량팀’에 대한 기사다. 법적인 보호 장치(산재 등 사대보험) 밖에서 기업이 요구하는 ‘급히 처리해야 하는 물량을 쳐내는’ 긴급팀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는 산재를 신청하지 못했다. 그는 “산재처리를 못하게 했다. 회사 총무가 차를 갖고 와 병원 직접 데려다줬다”고 말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일하다 다친 물량팀 노동자 10명 중 9명(94.3%)가 산재 처리를 받지 못했다. 또 다른 노동자도 “죽지 않는 이상은 공상처리라고 봐야한다”며 “자재차로 몰래 싣고 나간다. 걸리면 난리가 나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산재를 신청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블랙리스트에 오를까봐”(59.5%) “해고될까봐”(31.0%)라고 답했다. 3개월 혹은 6개월로 계약을 이어가는 노동자들이 건강권과 고용권을 두고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 대부분이 이미 정규직으로 취업하기 힘든 40대에서 50대라는 점도 이런 상황을 강제하는 요소 중 하나다.

물량팀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덕을 보는 건 결국 원청이다. 물량팀은 힘들고 위험한 일을, 정해진 안전 수칙까지 무시해가며, 빠른 시간 내에 해내기 때문이다. 원청이 특히 덕을 보는 건 산재다. 원청은 재해율에 따라 보험료를 납부해야 하는데 물량팀 노동자의 산재는 대부분 통계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조선소 내에서 노동자가 다쳐도 없는 일이 된다.

가령 지난해 현대중공업 재해율(노동자 100명 중 재해자 수)는 0.66으로 조선업 평균 재해율(0.69)보다 낮았다. 덕분에 현대중은 지난 해 1월~8월 산재보험료를 101억여원 감액 받았다. 그러나 하청업체의 재해율까지 포함하면 현대중의 재해율은 0.95까지 높아진다. 연구팀은 “물량팀의 산재까지 통계로 잡힌다면 지금의 재해율보다 훨씬 높아질 것”이라 지적했다.

시스템 안에서 어떤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자신의 생명이 ‘어떤 확률(위에서는 약 1%?)’에 의해서 잃을 수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해서 알면서도 ‘나는 아니겠지’로 버틸 수 밖에 없는 상황. 그 확률에 걸리면 난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하고 죽는 걸로 끝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그런 일자리.

스마트폰 육아

영유아의 스마트폰 사용이 안 좋다는 뉴스가 최근에 나오면서, 아기들의 뇌가 위험하다느니하는 공포를 조장하는 내용으로만 틀을 짜고 이야기하는데, 실제 이 연구를 진행한 가톨릭대 정윤경 교수의 인터뷰를 보면 이는 좀 심각하게 과장된 내용들이라는 걸 볼 수 있다. (아래는 내용 중 인용, 강조는 내가 했음)

연구 보면서 부모님들이 내가 아이 잘못 키웠구나, 죄책감을 갖진 말았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실제로 스마트폰 사용 관련 연구된 게 영유아는 결국 부모의 역할인데 부모가 꼭 자기 잘못이라기보다는 실제로 어떤 부모가 아이들한테 스마트폰을 많이 노출시키게 되는가 하면요. 자기가 양육 스트레스 그러니까 아이 키우는 게 힘들고 또 애들이랑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모르는 양육 효능감이 떨어진다든지 그런 부모들의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많이 써요. 실제로 자기도 아이 앞에서 무분별하게 쓰게 되고요. 그리고 아이가 쓰게 되더라도 중요한 건 규칙 없이 그냥 방치하는 거죠. 그런 경우에 결과가 가장 안 좋아요. 지금 어떻게 보면 부모의 스트레스, 양육의 문제, 아이를 어떻게 잘 키워야 하는지, 필요한 어떤 놀이를 어떻게 잘 해줘야 하는지 이런 것에 대한 지식이나 지원이 많으면 스마트폰에서 아이들을 구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들었습니다.

그렇죠. 제일 싸고 쉬운 베이비시터죠. 그렇지만 어떻든 모든 건 대가를 치르게 돼 있고 그리고 예전에는 없이도 살았잖아요. 저도 비슷한데요.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옛날에 우리 어릴 때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을까 스마트폰이 없을 때 그런 생각도 많이 해보는데요. 이때 아이들은 정말 자연물, 정말 감각적으로 통하고 느낄 수 있는 물건 그리고 사람이 가장 좋은 자극이거든요. 사실 스마트폰에 몰입되고 중독될 것 같은 아이들도 엄마랑 같이 아빠랑 같이 나가서 공차고 놀래? 그러면 이 아이들은 다 나가요. 우리는 아이들이 이걸 좋아해요 하고 던져주지만 아이들은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온몸으로 같이 놀고 세상을 경험할 수 있게 이끌어주시면 좋은데 그게 참 어렵긴 하죠 현실적으로.

아직 영유아 아이들은 중독까지라고는 얘기하지 않아요. 약간 그런 경향성이 보이는데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그게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아동 후기 또는 청소년기에 중독으로 이어질 수 있는 확률이 굉장히 높은 거죠. 그렇게 되면 다른 여러 가지 문제들이랑 겹치면서 부모 입장에서 더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아이들이 어릴 때 엄마랑 같이 놀까? 할 때 기쁘게 따라올 수 있을 때 다양하게 아이들과 이야기하고 놀고. 스마트기기도 결국 어찌 보면 사용할 수밖에 없는 건데 사용하더라도 부모가 규칙을 정해주고, 사용할 때 같이 보면서 아이가 무슨 게임 어떤 동영상을 보는지 이야기하고 그걸 통해서 같이 상호작용 할 수 있다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는 훨씬 결과가 좋게 나왔습니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부모의 소득과 노동 환경에 대한 문제가 매우 나쁜 상태인데, 이런 환경에 육아라는 것이 좋을 수가 있겠나. 결국 부모들도 육아 환경에 대해서 고민할 여력이 없으니 아이들은 방치되고, 이게 다시 나쁜 육아로 연결되고 그러는 것 아니겠나.

문제에 대한 이런 현상을 연구하는 것은 좋지만, 이를 해석함에 있어서 공포를 조장하는 방향으로 연결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 사회와 부모-자녀의 주변을 모두 늘어놓고 어디서 문제가 출발했는지를 확인해서,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것인데, ‘스마트폰을 주면 아이의 뇌가 위험해진다’는 식으로 조장하고 있다. 무책임한 기자의 무책임한 기사로 공포에 질린 부모들이 종국에는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게 한다. 눈을 가리는 것이다.

스마트폰이든 인터넷이든 게임이든, 소위 저들이 주장하는 ‘중독’의 문제는 환경의 문제라는 것은 정설이다. 아이들이 놀 꺼리가 없고, 놀아줄 사람이 없고, 놀 곳이 없고, 노는 방법을 모르고, 게다가 놀 시간도 없기 때문이다. 부모가 관심을 가지고 규칙을 정해서 교육한다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이렇게 할 수 있는 여력이나 여유가 있는 부모가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잡스와 빌게이츠, 자녀 게임 시간 제한?!

한 블로그에 스티브잡스와 빌게이츠도, 자녀 인터넷/게임 사용시간 제한?!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글을 올리면서, 하단에 유해 콘텐츠 차단 서비스를 광고하고 있었다.

본문이 근거로 인용한 기사는 두 개다. 각각 빌 게이츠 자녀들도 컴퓨터 ”하루 45분만”이라는 빌 게이츠의 사례와 잡스도 자녀에겐 “컴퓨터 안돼”…美기업주들 집에선 금지령이라는 스티브 잡스의 사례다.

미국의 기업가들만이 아니라, 미국은 부모들이 인터넷과 게임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다’. 게임의 콘텐츠에는 특정 연령에게 유해한 내용들이 있을 수 있으며 게임을 플레이함으로써 교우관계가 나빠지거나 나쁜 언어, 습관을 배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온라인 게임의 경우에는 게임이 아이에 미치는 영향 뿐 아니라 아이가 온라인 공간에서 어떤 짓들을 하고 다니는지를 잘 안다.

그래서, 게이츠는

“부모들은 자녀가 일정한 나이를 넘어서게 되면 그들이 인터넷을 통해 무얼 보는지 살펴봐야 하며, 또 그들이 본 것에 관해 얘기를 나눠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밝힌 게이츠는 아들이 “나는 평생 컴퓨터 이용에 제한을 받아야 하나요?”라고 묻길래 “아니, 네가 커서 따로 나가 살면 네 맘대로 하렴”이라고 답했다는 일화를 소개해 청중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라고 말하고, 스티브 잡스는

잡스의 공식 전기를 집필했던 월터 아이작슨도 “스티브는 저녁이면 부엌에 있는 길고 커다란 식탁에 앉아 아이들과 책, 역사, 그 외에 여러 가지 화제를 놓고 얘기했다”면서 “아무도 아이패드나 컴퓨터 얘기를 끄집어내지 않았다. 아이들은 모든 기기에 중독된 것 같지 않아 보였다”고 말했다.

라면서 부모와의 대화를 강조하고 가족간의 유대를 강조한다.

저녁에 식탁에 모여 앉아서 대화를 하거나, 자녀가 인터넷으로 뭘 하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게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이다.

한국의 부모들은 이런 것을 할 여유가 없다. 부모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하고 싶지만 할 시간이 없다’고 모두들 입을 모아 말한다. 부모가 직장에서 늦게 퇴근을 하거나, 아니면 자녀들이 학교-학원에서 늦게까지 있다가 귀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부모의 출근 시간과 맞지 않아서 자녀들의 등교 시간이 늦어지는 걸 바라지 않는다. 결국 부모의 노동 환경이 자녀의 교육 환경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부모가 자녀의 인터넷과 게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관리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해법이다.

하지만 이 역할을 부모들이 직접할 시간과 여유가 없기 때문에, 부모들은 이 역할을 국가가 해달라고 떠맡긴다. 그리고 국가는 이런 역할을 해주겠다며 안방까지 들어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

셧다운제 철폐나 게임의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는 문제는 돌고 돌아서 결국 노동 환경의 문제가 된다. 부모들이 더 여유를 갖게 되고 학생들이 한국의 콩나물 시루 같은 교육 환경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 저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