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얼마 전 수직적 조직 구조를 개선한다고 하는 뉴스가 났다. 이렇게 댓글을 달았더랬다.

호칭이 조직의 경직이나 위계, 수직화를 만들고 있던 거였나보네요, 호칭 바꾸면 사내 분위기도 부드러워지고 조직의 경직성도 해소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잘 돌아갈 수 있다는 진단에서 하는 거겠죠?

그리고 어제, 조선일보에서 ‘삼성이 자기반성에서 간과한 것‘이라는 기사를 냈다.

지난 21일 삼성그룹 계열사에 일제히 방영된 사내방송 ‘삼성 소프트웨어 경쟁력 백서, 1부 소프트웨어의 불편한 진실’ 때문이다. 이날 방송에서는 삼성전자의 소프트웨어 개발인력이 3만2000명으로 구글의 2만3000명 보다 많지만 문제해결 능력으로 따지면 삼성 인력의 1~2%만이 구글에 입사할 수준이라는 내용이 나왔다.

그러나 삼성전자에는 하드웨어 제조사의 DNA로 꽉 차있다. 삼성전자의 소프트웨어는 스마트폰이나 가전 완제품의 출시 일정에 맞춰 개발됐다. 신제품의 출시 주기는 반년 또는 1년 정도다. 촉박한 일정에 다듬어지지 않거나, 보완이 덜 된 서비스를 내놓기 일쑤였다. 2014년 해체된 소프트웨어 개발 조직인 미디어솔루션센터(MSC)의 실패 원인도 여기에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인사 제도가 악순환을 더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임원이 모든 소프트웨어 상품의 운명을 결정짓는 구조인데, 임기 연장을 걱정하는 임원들은 성과지표(KPI)를 우선시하기 마련이다. 신입 임원 교육이 끝나고 3월에 본격적인 개발 업무에 들어가면, 9월에는 끝마쳐야 한다. 10월부터 KPI 평가 준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결국 장기적인 안목보다는 ‘고과용’으로 만든 소프트웨어가 나오게 된다. 해가 바뀌면 상당수의 임원이 갈리고 이전 소프트웨어는 유지보수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채 방치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구조적, 총체적 문제는 어느 하나의 문제를 개선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 특히 한국의 대기업은 ‘견제받지 않는 오너 중심 체제’를 버릴리가 없으므로 이 문제의 가장 큰 부분이자 가장 밑바닥에 있는 문제를 개선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저것 만 바꾸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그런 것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문제 파악을 제대로 하지 않으니 답이 제대로 나올리가 있나. 정작 자신은 바꾸지 않으면서 가족 빼고 다 바꾸라는 이야기도 있긴 했구나. 거기에 비판도 있는데 이런 건 안 듣고.

한국 게임 산업에 대한 문제도 비슷하다.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하고 있으니 ‘라면 정신‘ 같은 것이나 강조하는 글을 써제끼는 것이지.

게구리 논란과 게임계의 성 차별

여성 게이머는 원래 게임 안에서 잘 해도 욕을 먹고 못 해도 욕을 먹는다. 아니 플레이를 잘 한다 잘 못한다를 논하기 이전에 여성 게이머는 ‘보호의 대상’이거나 ‘뒤에서 힐이나 해’야하는 존재이고, 또 게임 플레이와 관계 없이 ‘누가 봤다는데 존나 예쁘더라’로 소비되는 대상일 뿐이다. 원래 그렇다.

대체로 여성 게이머들은 그래서 게임 안에서 성별을 밝히는게 좋은 일로 연결되는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에, 성별을 밝히지 않는다. 통계적으로 전체 MMORPG 플레이어의 3~40% 가량은 여성이다. 하지만 게임 안에서 ‘명백히 여성인 플레이어’를 30%나 보고 있나? 아닐걸. 여성이라는 걸 밝혀봐야 인기가 있으면 여왕벌이 되고, 인기가 없으면 남자 꼬시려고 게임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이게 성 역할론, 성적 대상화로 연결된다.

게임 안에서 주도적인 역할(전사라든지 미드라이너라든지)은 당연히 남성이 하는 것이고, 여성은 뒤에서 힐이나 마법을 쓰면서 1234 누르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처음 롤을 시작하는 여성이 있다고 하면 의례껏 서폿을 시키는 것이고, 처음 MMORPG를 시작하는 여성은 의례껏 사제를 하게 한다. 이런 게이머들의 편견이 게구리 논란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여자가 이렇게 잘 할리가 없다’, ‘여자인데도 잘 한다’.

대체로 ‘~에도 (불구하고)’는 척박한 조건이라든지 환경에 대해서 붙이지만, ‘여자임에도 불구하고’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여자인 것이 척박한 조건이나 환경이라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여자는 원래 게임을 못 하는 존재이지만, 넌 잘한다’는 말이다. 칭찬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이구나’라는 말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상대보다 못 하는 것을 납득하는 말이다. 롤의 ‘Faker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선수라서 내가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에게 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특별한 재능을 가진 선수이므로 내가 너보다 못 하는 것을 납득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건 현실의 성차별에서도 같다. ‘여자는 약하다’ 하지만 훈련 받은 군인이나 선수들은 나보다 강하지만, 그들은 특별한 존재라서 인정한다. 그리고 ‘어차피 걔들도 남자 군인한테는 진다’ 같은 표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군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여성 군인’이고 ‘남성 군인 보다는 약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성차별적인 사고는 어떻게 보면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문화적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여자 애한테 무슨 공부를 가르쳐’라는 부모들이 6~70년대 결혼한 내 부모들이었고, ‘여자는 결혼이나 잘 하면 되지’라는게 지금의 부모들이다. 달라진게 없다. 지금의 청년들은 이걸 그대로 물려받아 ‘여자들은 취집이 있잖냐’는 말을 흔하게 내뱉는 상황이다. 어쩌면 더 나빠졌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체화되어 있는 성차별적 사고를 어떻게 인지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사회는 다르게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이게 무슨 성 차별이냐’고 반발하는 이들이 많을수록 이런 충돌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사실 이 세계는 ‘남성이 만든 것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만들어 왔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남성의 성취만 기억할 뿐, 여성의 성취에 대해서 기억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기억이 역사를 만들고, 역사에서 여성의 이름은 사라진다.

여성은 흑인보다도 투표권을 늦게 가질 정도로 노예에 가까웠다. 그리고 보이지 않게 지금도 편견들에 의해 사회의 진출을 제약당하고, 성취를 약탈당하고, 무시당하며 멸시당하고 있다. 그러지 말자. 여자가 게임을 잘 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여성이 게임 안에서 편하게 게임할 수 있게 만드는 것도 또한 페미니즘이다. 그리고 그건, ‘게임 세상’을 점령하고 있는 남성들이 해야할 일이다.

마치 거실에 혼자 앉아 게임을 하다가, 여자친구에게 앉으라며 옆으로 살짝 비켜 앉는 것처럼.

게구리 논란과 게임계의 성 차별

붉은 여왕 가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붉은 여왕 이야기가 나온다. 선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달려야만 하는 그런 상황인데, 진화학에서는 이를 이용해서 ‘붉은 여왕 가설(Red Queen hypothesis)’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 냈다. 말하자면 계속 진화를 하지 않으면 생존 경쟁에서 밀려 죽는다는 것이다.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 같은 곳에서 주로 사용하는 것 같다.

인간의 역사라는 것도 비슷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계속 공부하고 사고하지 않으면 멈춰 서고 뒤쳐지게 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보는 수 많은 ‘정신 빠진 노인들’이 60년대의 사고로 현대의 청년들과 대화를 하는 모양새가 딱 그렇다, 그들은 자신의 젊은 시절 이후로 사고를 멈춘 것이다.

같은 견지에서 지금의 청년들을 볼 때도 비슷하다. 이미 사고를 멈춘 자들과 나이가 40인데 90년대의 사고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도처에 있다. 각각 40년 20년 뒤가 되면 저들이 현재의 ‘정신 빠진 노인들’과 같은 모습이 될 것이 아니라고 누가 단언 하겠나.

계속 공부를 하고 사고를 해야 한다. 뉴스를 볼 때마다, 사건을 접할 때마다, 주변의 상황과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 다양한 매체와 다양한 이야기들을 보고, 그것이 현재 학술적으로는 어떻게 연구가 되고 있고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를 계속 추적해야 한다. 바쁘다, 60년대의 과학 철학 사회 분야에 비해서 지금은 백 배 천 배는 많은 분야를 공부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최대한 자신이 아는 분야에서만이라도 첨단의 지식과 판단력을 유지해야 한다.

사고를 멈추면 그것은 이미 죽는 것이다.

붉은 여왕 가설

뉴스 미디어의 변화와 게임

지디넷에 올라온 “WP의 베조스 효과…”격식 깨고 기술 입혔다라는 기사를 읽는 중에 제프 베조스의 이런 발언 이야기가 나왔다.

“그 동안 우린 상대적으로 소수 독자를 확보한 뒤 독자 한 명당 많은 돈을 버는 방식으로 해왔다. 하지만 앞으론 많은 독자들을 기반으로 독자 1인당 적은 돈을 벌어들이는 방식을 택할 필요가 있다.”
– 제프 베조스(Jeffrey Preston “Jeff” Bezos)

게임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면 어떤가. ‘그 동안 우린 상대적으로 소수 게이머를 확보한 뒤 게이머 한 명당 많은 돈을 버는 방식으로 해왔다’라고 바꿔도 문제가 없지 않은가. 이 구조를 바꾸는데는 (현재의 내가 보기에)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한듯 하다.

  1. 고객 확보 비용
  2. 대중적 콘텐츠
  3. 맞춤 전략

게임도 뉴스와 마찬가지로 고객 확보 비용에서 유사한 문제를 가지고 있어 보인다. 일단 게임을 시작하게 하는데 뉴스는 페이스북 등의 바이럴 링크를 활용하고 있고, 게임은 주로 미디어 광고나 바이럴을 활용하고 있는게 약간 다른 부분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비슷하다고 본다. 또한 콘텐츠의 대중적인 접근성(뉴스 기사의 수준 vs 게임의 난이도 등) 면에서도 유사한 부분이 있다.

기사의 ‘고객 참여 깔대기 원칙’ 중 깔대기 상층(우연한 방문자)의 매출 구조는 광고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이들은 방문했다가 지나가는 고객이므로 현재 지불 의사를 가지고 있는 고객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콘텐츠에 매력을 느끼고 ‘정기 방문자’ 이상으로 이동하게 될 때는 구매 가능성을 가진 진짜 고객이 된다. 그러면 여기서부터는 광고의 비중이 낮아질 것이다. 그리고 낮춰줘도 되지 않을까.

여기서 문제는 이 고객이 ‘우연한 방문자’인지 ‘정기 방문자가 첫 방문자’인지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즉 이 고객의 행동 패턴을 분류하고 이전 모델(분석 결과에 유사한 모델)에서 ‘정기 방문자가 된 고객’들에 합치된다는 걸 빠르게 판단하고, 거기에 맞는 콘텐츠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핵심 임무를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 한 가볍게 처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 댄 케니디(Dan Kennedy)

종합해서 생각해보면, 고객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접근했을 때 기본적으로 광고 모델을 적용해서 콘텐츠를 제공하지만, 이 고객이 어떤 고객인지를 빨리 분석해서 하층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거나 이동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를 판단하는 것이 ‘첫 구매’를 용이하게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고객이 살 의지를 가질만한 제품을 빠르게 분석해서 제공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업계의 모든 통계를 봤을 때, ‘한 번 산 고객은 다시 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단 ‘첫 구매’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다.

미디어 전체가 급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게임은 어떻게 바뀌어야할 것인가. 그런 생각으로 이어진다.

뉴스 미디어의 변화와 게임

운동 집단에서 여성의 위치

이 내용은 넷플릭스의 <She’s Beautiful when she’s angry>라는 다큐멘터리 중 발췌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60년대 형성하기 시작한 당시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당시 활동가들이 직접 구술로 회상하고 있다. (관련 기사, 영문)

Fran Beal: 그 당시에 있었던 모든 사회적 변화 운동은 결국 여성 운동으로 귀결됐어요. 그들은 여성의 의식화를 높이고자 했죠. 동등한 환경에서 활동하기 위한 필요성이요.

Ruth Rosen: 시민권 운동의 일원으로 반전 운동의 큰 부분을 맡았어요. 버클리 대학원 시절이었죠. 뉴레프트 조직 여성은 직접 느끼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Susan Griffin: 상대적으로 여성은 상당한 차별을 받고 있었죠. 남자들은 이름이 알려졌고 연사가 되기도 했죠. 우린 편지 봉투 풀칠 같은 걸 했죠. 고된 일은 우리가 했어요. 우리가 실제 일(ground works)은 다 했죠. 종종 실제 조직화하는 일도 했어요.

Heather Booth: 전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 연합(SDS) 집회에서 토론했어요. 그리고 저는 그 조직의 리더였죠. 조직의 한 남자가 ‘닥치고 찌그러져’ 이러는 거예요.

Marilyn Webb: 우린 SDS 내에서 여자로서의 고유 역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죠. 왜 우린 지도자 위치에 있지 않은 거야? 그때부터 모든 사람에게 인식의 스파크가 일어났어요. (아하)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다른 사람도 불안하구나.

닉슨의 선거를 저지하는 반전 데모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여성 자체적으로 집단을 만들기로 했죠. 그리고 자체 운동을 선언했어요.

Ellen Willis: 마릴린 웹이 무대에 올라 수많은 뉴레프트(주: 신좌파) 남자들 군중 앞에서 연설을 시작하려고 했어요.

Marilyn Webb: 제가 연설을 시작하자마자 군중들이 미쳐 날뛰었죠.

Ellen Willis: 남자들은 휘파람과 야유를 퍼부었어요. 그리고 ‘무대에서 끌어내려 떡이나 쳐라(Take her off the stage and fuck her)!'(같은 소리를 질렀죠.(자막 누락))

Marilyn Webb: 군중들이 소리쳤죠 ‘구석에 데려가 떡 쳐라(Fuck her down at dark alley)!’ 그건 마치 미친 군중들이었어요.

Ellen Willis: 우린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어이가 없었죠… 뭐야?

Marilyn Webb: 운동하는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할 거라 생각도 못 했어요. 충격받았죠. 흑인 조직도 있고, 저소득층 부녀 조직도 있고, 우린 여성을 조직했는데 다들 이걸 전체 운동의 또 다른 줄기로 봤죠. 하지만 우리는 대접받지 못했어요. (09:20~11:50)

저기서 나오는 60년대 당시 미국 ‘신좌파’들의 행동과 이후 모습은 80~90년대 한국 운동권 진영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다큐멘터리 뒷 부분에는 신좌파들이 페미니즘 운동에 어찌할바를 모르는 모습들도 비춰진다.) 그리고 저 모습들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변한게 전혀 없다고 보인다는게 슬픈 지점이다.

심지어 이제 한국에서 좌파 운동이라는 개념이 사실상 망해버린 상황에서, 자칭 진보라고 싸돌아다니는 혹은 진보 정당의 지지자라는 사람들의 모습에도 저와 같은 것이 똑같이 드러나고 있다. 20년 만에 운동권의 모습이 일반에 다시 나타난 것인가! 하면 그게 아니라, 그 때 그 인간들이 386에서 지금 586세대가 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개선된 것이 없이 그대로 내리 계승되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를 고치려 하지 않았고 페미니스트 활동에 귀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시 좌파 & 진보 진영 안에서 여성 활동가들과 동지들에게 일어났던 사건들, 그 후속 처리들 등을 보면 특히 변한 것은 없다.)

2016년 5월 현재 페이스북과 클리앙을 위시한 온갖 자칭 진보들이 ‘일베나 메갈이나’하며 페미니즘 활동에 ‘무대에서 끌어내려 떡이나 쳐라(Take her off the stage and fuck her)!’ 같은 소리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도 공부 안 하고 말만 많던 386들이 지금 상당 수 현실 정치인이 되어 있고, 지금도 여전히 공부 안 하고 말만 많은 인간들이 진보랍시고 같은 상황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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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all Street Ogle-In Of 1970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지금 페미니스트 진영 일부에서 ‘미러링’이라고 부르는 것 비슷하게) 그 당시 ‘추파의 날(Ogle day in Wallstreet)’이라는 걸 만들어서 남성들이 여성에게 성적 대상화하는 발언들을 던지는 걸 그대로 되돌려주는(same kind of double-edged sexualized compliments) 활동을 기획했다고 한다.

  • ‘미러링’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여전히 정의에 논란이 있지만, 그 개념이 저 때부터 있었다고.
운동 집단에서 여성의 위치

게임에서 규칙의 의미

아날로그 게임에서 규칙은 ‘할 수 없는 것의 리스트’를 뜻한다. 이 공식적인 규칙 외의 것들은 플레이어들끼리 합의를 하거나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바둑은 플레이어끼리 반상에 돌을 놓는 것만 할 수 있고, 어떻게 놓인 돌은 어떤 효과를 갖는다는 것에 대한 규칙이다. 플레이어들은 이 외에 정해지지 않은 ‘사소한’ 바둑 돌을 손에 쥐고 딸깍거리거나 뭉쳐 흔들며 소리를 내거나 하는 행동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만약 플레이 상대가 상대의 행동이 불편하거나 자신의 플레이에 방해된다고 느낀다면 이에 불만을 표시할 수 있고, 두 플레이어가 합의해서 ‘돌 굴리는 소리를 내지 말자’고 임시적인 금지 규칙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 규칙은 임시적인 것이고, 상대가 바뀌거나 새로운 게임에서는 다시 이전의 규칙을 계승하는 합의를 해야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축구 같은 구기 종목도 (현대에 와서는 매우 상세해졌지만) 기본적으로는 상대의 골에 공을 넣는 것만 규정이 되어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경기장 안에서 상대를 때리거나 꼬집거나 옷을 붙잡고 늘어진다거나 하는 ‘사소한’ 방해 행위들을 할 수 있다. 상대 팀의 선수들이 이를 불편하게 여기고 불만을 제기하면 플레이어들은 경기를 잠시 중지하고 이를 금지한다는 내용에 합의한 뒤 경기를 속행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규칙들을 현대의 공식적인 경기들 – 학교 대항전이나 프로팀, 국가대표의 경기 등 – 에서는 세부적인 내용까지 합의된 규칙이 존재한다. 물론 그럼에도 사소한 ‘창의적인’ 반칙들은 규칙 외에 존재하고 이것들은 새로운 국제적 표준 합의에 의해서 정리되기 전까지는 암묵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인 상태이다.

흔히 TRPG라고 말하는 종이 RPG(pen and paper RPG)게임에서 규칙은 아날로그 게임과 같은 맥락을 갖는다. 플레이어들은 어떤 것을 하기 위해서 규칙책에 규정된 내용은 반드시 해야하지만, 이 외의 것들은 플레이어와 마스터, 플레이어와 플레이어의 합의로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 ‘창의적인’ 플레이는 마스터를 당황하게 하기도 하고 파티원(동료 플레이어들)의 환호성을 끌어내기도 하지만, 이 내용은 규칙 사이의 빈틈을 노리는 것이거나 마스터(P&PRPG에서 마스터는 규칙과 동일시된다)의 동의를 이끌어내어 합의되고 가능한 행동이 된다.

반면, 컴퓨터를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 게임에서 규칙은 반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의 리스트’이다. 디지털 게임의 구현 과정이 ‘할 수 있는 기능의 구현’이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프로그래밍된 행동만 할 수 있다. 즉, 구현된 기능은 할 수 있는 기능이고, 이것은 규칙에 포함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오픈월드 형태의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은 구현된 내용은 게임 플레이의 규칙에 위배되지 않는다. 위배되는 내용들은 애초에 구현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게임이 의도하지 않은 버그를 이용해서 플레이하거나 헛점(glitch)을 이용한 플레이는 디지털 게임의 구조상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플레이어들은 이런 규칙 위반이 플레이어들에게 이익이 되고 그 (관리자나 개발자에게 들킬) 위험이 충분히 낮다면 이를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

게임에서 규칙의 의미

업적과 패턴

While games have evolved massively in the twenty-odd years since arcades ruled adolescence, those basic ideas of progression and completion remain integral to the experience. Yet we never really stop to ask: why is the illusion of accomplishment so central to games, and why do gamers need that sense of achievement from the games they play?

The answer lies in several foundational theories of psychology, and how the mind is built to cope with the world. In short, an addiction to achievements is an addiction to being human, and being human starts with the desire to punch a tree.

In the same way, a constant stream of achievements in a videogame can subconsciously encourage the player to carry on playing. Now, the idea of psychological conditioning has an assumed malevolence to it, and a tendency to conjure Brave New World style images of brainwashing and control. Indeed, the mainstream media frequently falls over itself to cite this similarity as another reason to demonise videogames (think of the children!). Yet conditioning is how all thinking beings learn to interact with the world, how to avoid hazards such as fire and satisfy basic needs such as hunger. Moreover, achievements are an extremely mild form of reinforcement, easily overridden by a rational human mind. In other words, people aren’t pigeons.

Why are you Addicted to Achievement?, IGN

업적이라고 흔히 번역하는 achievement를 나는 ‘달성도’라고도 쓰는데, 본문에서는 매슬로(Abraham Maslow)의 욕구 단계설과 스키너(B. F. Skinner)의 실험을 예로 들면서 설명하고 있다. 사실 이렇게 게임 안에서 플레이어들에게 무언가를 하게 만들고, 그것을 기뻐하게 만들고, 다시 새로운 것을 시도하게 만드는 과정의 밑바닥에는 한 층위가 더 있다고 보는 쪽이다.

Pattern pleases us, rewards a mind seduced and yet exhausted by complexity. We crave pattern, and find it all around us, in petals, sand dunes, pine cones, contrails. Our buildings, our symphonies, our clothing, our societies — all declare patterns. Even our actions: habits, rules, codes of honor, sports, traditions — we have many names for patterns of conduct. They reassure us that life is orderly.

– ESSAY; I Sing the Body’s Pattern Recognition Machine, New York Times

무질서 더미 속에서 패턴을 발견하려는 심리인데, 이렇게 찾은 패턴을 새로운 것에 적용하면서 그것이 들어맞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이를 더 강화하기 위해서 ‘찾은 패턴이 정답입니다’라는 반응으로 ‘업적’을 획득하게 해주는게 추가된 것이고, 이 반복을 지루해하지 않도록 한 것이 스키너의 실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업적과 패턴

“쇼비즈니스는 탄광과 비슷해. 집에 가서도 때가 씻겨지질 않지.(The bullshit business, it’s like coal-mining – you come home to your wife and kids, you can’t wash it off.)” – Lester Siegel, Argo(2012)

인용

사피엔스를 읽는 중에

어제 저녁부터 <사피엔스>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은 인류가 어떻게 진화했고 적응했고 이종들을 멸종시켰고 자신들이 진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망가졌는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인류에게는 인지 혁명, 농업혁명, 과학 혁명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 중 인지혁명이 있은 이후 인류가 ‘가상의 실재’라는 것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를 하고,

인지혁명 이후, 사피엔스는 이중의 실재 속에서 살게 되었다. 한쪽에는 강, 나무, 사자라는 객관적 실재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신, 국가, 법인이라는 가상의 실재가 존재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상의 실재는 더 강력해졌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강과 나무와 사자의 생존이 미국이나 구글 같은 가상의 실재들의 자비에 좌우될 지경이다. (p49)

이 가상의 실재는 ‘상호 주관’을 통해서 ‘공통적으로 믿어지는 것’들이라고 정의하며,

상호 주관이란 많은 개인의 주관적 의식을 연결하는 의사소통망 내에 존재하는 무엇이다. 단 한 명의 개인이 신념을 바꾸거나 죽는다 해도 그에 따른 영향은 없지만, 그물망 속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거나 신념을 바꾼다면 상호 주관적 현상은 변형되거나 사라진다. 상호 주관적 현상이란 악의적인 사기나 하찮은 가식이 아니다. 방사능 같은 물리적 현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지만, 세상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할 수 있다. 역사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인 중 다수가 상호 주관적이다. 법, 돈, 신, 국가가 모두 그런 예다.

푸조는 그 회사 CEO의 상상 속 친구가 아니다. 수백만 명이 공유하는 상상 속에 존재하는 회사다. 그 CEO가 그 회사의 존재를 믿는 것은 임원들, 회사의 법률가들, 근처 사무실의 비서들, 은행의 출납계원들, 주식거래소의 중개인들, 프랑스에서 호주까지 전 세계에서 근무하는 자동차 딜러들 역시 그 존재를 믿기 때문이다. 만일 CEO 혼자서 믿음을 갑자기 버린다면, 그는 신속하게 가장 가가운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달러와, 인권, 미국은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수십억 명이 공유하는 상상 속에 존재한다. 한 개인은 누구라도 그 존재를 위협할 수 없다. 만일 나 혼자 달러나 인권, 미국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해도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런 상상의 질서는 상호 주관적이며, 이를 변화시키려면 수십억 명의 의식을 동시에 변화시켜야 한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대규모 변화가 일어나려면 정당이나 이념운동, 혹은 종교적 광신집단 같은 복잡한 기구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복잡한 기구를 만들자면 서로 모르는 많은 사람을 협력하게 만들어야 하고, 그런 일은 오로지 그들이 뭔가 신화를 공유하고 있을 때만 일어난다. 그러니 현존하는 가상의 질서를 변화시키려면 그 대안이 되는 가상의 질서를 먼저 믿어야 하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푸조를 해체하려면 프랑스 법률체계처럼 그보다 더 강력한 뭔가를 상상해야 하고, 프랑스 법률체계를 해체하려면 그보다 더 강력한 무엇, 예컨대 프랑스라는 국가를 상상해야 한다. 국가마저 해체하려고 한다면, 그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를 상상해야 할 것이다.

상상의 질서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우리가 감옥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실상은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일 뿐이다. (p131)

이제는 이를 빠져나갈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인류(사피엔스)는 이제 현실 위에 가상의 실재, 즉 믿음 위에 존재하는 것들을 통해 서로의 관계를 구성하고 있고, 이것들이 만들어낸 질서에 의해서 통제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 질서를 바꾸기 위해서는 새로운 질서의 꿈을 꾸고 그 꿈을 모두가 믿게하는데 달려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대 사회의 질서를 바꾸기 위해서는 ‘사회 변혁’이라는 꿈(새로운 가상의 질서)을 많은 사람들이 믿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런 관점에서 지금 현실을 돌아 보자면 ‘사회 변혁’에 대한 믿음이 이제 거의 무너진 상태이므로 가능성이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다른 글, 스켑틱(Skeptic)에 실린 <테러리즘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들(Myths of Terrorism)>이라는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의 글에는 이런 인용 부분이 나온다.

체노베스는 이어서 “이런 추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강화된다. 지난 50년 동안 시민 저항 운동은 그 효과도 강력해지고 빈도도 지속적으로 증가했던 반면에 폭력적 투쟁은 점차 횟수도 줄고 대부분 실패했다. 비폭력 저항이 실패할 것으로 여겨지는 극도로 억압적인 권위주의 독재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비폭력이 폭력보다 목적 달성이란 측면에서 더 뛰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민중의 힘”이라고 체노베스는 말한다. 그러면 얼마나 많은 민중이 저항에 참여해야 하는가. 그녀의 데이터에 따르면 “일단 전 인구의 3.5%가 능동적이고 지속적으로 참여한 저항운동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으며, 많은 경우 그보다 작은 참여율로도 성공했다.” 또한 “실제로 3.5%의 문턱을 넘어선 모든 투쟁은 비폭력적인 것이었다. 순전히 비폭력 수단에 의지한 투쟁의 규모는 평균적으로 폭력적 투쟁의 네 배였다. 그리고 성별, 연령, 인종, 정치세력, 사회계층, 그리고 생활 영역권에서의 대표성도 훨씬 높았다.” (Stephan and Chenoweth, 2008, 인용의 재인용)

일반적으로 사회적인 인식이 변화하는 기점을 60% 정도로 보는 관점이 있는데, 이 60%를 만들어내는 것은 3.5%의 사람들이 ‘능동적이고 지속적으로 참여한 운동’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사피엔스를 읽는 중에

게임의 VR은 어떻게 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VR이 미래의 대세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시장 선점’을 노리며 뛰어들고 있지만, 나는 VR이 생각처럼 그렇게 대세가 되는 기술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HMD는 너무 무겁고 콘텐츠 생산 비용이 비싸다.

HMD의 가격은 갈수록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모든 기술이 그렇게 되어왔으니까. 쓸만한 HMD가 $100 이하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에 구입을 하고 번들 데모를 즐기며 우와~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이후에 ‘돈을 내고 살만한 콘텐츠’가 뭐가 있을까를 생각하면, 역시나 3D TV의 길을 따르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사람들은 VR로 (지금 기준으로) 휘황찬란한 어새신크리드나 폴아웃 세계, 아니면 디비전이나 등등의 콘솔급 그래픽의 화면과 게임성을 기대하겠지만, 실제로 이런 대작 콘텐츠들은 대자본이 투입되는 만큼 높은 BEP를 달성하기 위해서 대중성을 첫 번째 요소로 놓는다. 하이엔드의 엄청난 그래픽보다는 중저가의 그래픽에서 돌아갈만한 적당한 그래픽에 그럴듯한 게임성이 우선인 것이다.

그래서 VR은 잘 되어봐야 마케팅의 가치로만 활용될 것이고, 시대의 변곡점이 넘어가는 순간까지는 쉽게 VR을 도입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 ‘대세점’은 대체로 60% 정도로 보는데, VR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시기에나 가능할 거라는 이야기다.

이 대세점을 넘는다고 해도, ‘그럴듯한 입체감과 리얼리티’를 제공할만한 콘텐츠 생산 비용은 갈수록 어마어마해지고 있어서, 2~30명 규모의 개발팀으로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대략 추정컨대 100억 정도의 개발비는 투입을 해야 ‘소비자들이 원하는 수준’의 퀄리티가 나올 것이다.

VR의 HMD가 넘어야할 산은 부지기수다. HMD를 쓴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대한 인식, 무게에 의한 피로감, 입체감과 두뇌의 인지 차이에 의한 멀미, 본체(컴퓨터나 콘솔)의 사양, VR 기술의 표준화, 입력 장치의 변화, 입력 장치의 피로감… 등 끝이 없다.

아마도 내 예상으로는, 앞으로 VR이 $100 수준의 기기가 되기까지 2~3년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안에 VR의 대체 기술의 시제품이 나올 가능성이 높고, 소비자들은 대체기술의 대중화를 기다리며 계속 모니터를 사용할 것이다.

물론 나는 VR보다 MS의 홀로렌즈(AR) 쪽이 훨씬 빠르게 대중화되어 달라고 기대를 품고 있지만, 아마도 이것도 한참 늦게나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터페이스의 진화는 업무와 게임 모두에 활용할 수 있는 마우스 이후로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쪽이다.

게임의 VR은 어떻게 될 것인가